중증장애인 지원가들의 외침 ‘일하는 기쁨을 빼앗지 마세요’
발달장애 등 중증장애인이
중증장애인 상담·외출 등
사회활동 지원·취업 도와
“자립 시작한 이들에 뿌듯”
정부, 중복 사업 이유로
내년 예산 전액 삭감 발표
복지부와 취업 연계 계획
“우리를 노동자가 아닌
복지 대상자로만 생각해”
“남태준, 할 수 있습니다!“
지난 4일 오전 9시50분 서울 성북구 ‘피플퍼스트 성북센터’로 들어서자 손글씨로 적은 응원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실 청소를 마친 문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함을 건넨 청년의 인사가 사무실에 울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피플퍼스트 성북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는 남태준입니다!”
발달장애인 남태준씨(24)는 성북센터에서 일하는 세 ‘동료지원가’ 중 한 명이다. 동료지원가는 중증장애인이 다른 중증장애인의 상담·자조모임·외출 등 사회활동을 지원하고 취업으로 이끄는 일을 한다. 2019년 시행됐다.
“자, 한 시간 뒤에 주간회의 시작할게요.” 김하은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말하자, 추석연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던 남씨가 자리에 앉았다. 남씨는 이날 오전 기사 스크랩과 장애인 권리옹호 활동 보고서 작성을 맡았다. 그는 더 많은 중증장애인의 일할 권리를 위해 기사를 읽으며 고민하고 기자회견 등에서 목소리를 낸다. 자신과 같은 발달장애인들이 왜 일해야 하고, 어떻게 일할 수 있는지 알리기 위해서다. “더 많은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구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씨가 작성한 보고서 곳곳에 적힌 문구다.
남씨는 이 일을 하며 자신의 적성을 찾았다. 장애인권 활동을 글로 정리해 센터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업무를 하는 남씨는 ‘문서 작성’에서 소질을 찾았다고 했다. “제가 문서 작업을 잘하거든요.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 중요해요.” 한 글자도 허투루 입력하지 않겠다는 듯, 남씨의 타이핑은 급하기보다 신중했다.
센터 동료 11명과 합을 맞춰야 하는 업무도 있다. 오전 11시 시작된 주간회의에서 남씨와 동료들은 참여자(동료지원 대상)와 함께하는 자조모임 일정을 정하고, 웹자보를 기획했다.
남씨의 책상 위에는 ‘직장인 ○○○의 하루’라고 쓰인 생활계획표 양식이 있다. 남씨와 동료들이 성북구 장애인 평생교육시설에서 일하지 않는 발달장애인에게 직장인의 삶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자료다. 자신을 만나 꿈을 갖게 된 이들, 일을 시작하고 사회로 나오는 이들을 볼 때 남씨는 뿌듯하다고 했다.
이날 오후 4시 남씨와 동료들이 만나러간 발달·청각 중복장애인 이승준씨(21)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지난해 12월 남씨와 동료지원가·참여자 사이로 만난 이씨는 지난달 25일 고시원에서 벗어나 자립을 시작했다. 이날 열린 이씨의 집들이는 두루마리 휴지와 스팸 세트, 축하 케이크를 들고 온 이들로 북적였다.
자립 축하 카드를 받아든 이씨는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수어를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며 “피플퍼스트를 만나고 이 꿈을 더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씨는 약 6개월간 주기적으로 이씨를 만나 미래 계획과 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꿈을 품는 불안감을 나눌 때도, 희망에 차 하고 싶은 일을 나열해볼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꿈과 거리가 멀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실적 부진과 사업 중복을 이유로 내년도 관련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동료들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 “왜 우리를 쫓아냈던 것일까요? 기분이 정말 안 좋았어요.” 남씨는 동료지원가 사업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역시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남씨가 가장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은, 급여도 명함도 아닌 ‘일하는 기쁨’이다.
활동가들은 중증장애인을 노동자로 보지 않는 인식이 예산 삭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노동부는 해당 사업이 복지부가 주관하는 ‘동료상담가’와 중복된다고 하지만 동료지원가는 중증장애인의 ‘취업’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업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과거 정책이 중증장애인을 복지서비스 수혜자로 보고 단기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면 동료지원가 사업은 중증장애인을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당사자로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하은 피플퍼스트 활동가는 “2022년 기준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 197명이 중증장애인 참여자 3202명을 만났고, 그 안에는 노동부의 취업상담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사회활동에서 소외됐던 수많은 이들이 있다”면서 “동료지원가 한 명 한 명이 그런 이들을 발굴해 만나왔다는 점이 성과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노동부는 예산 전액 삭감으로 일자리를 잃는 동료지원가들을 복지부의 다른 일자리나 장애인표준사업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연계하겠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이에 대해 김 활동가는 “중증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책임을 복지부와 민간에 떠넘기려는 노동부는 사실상 중증장애인을 복지의 대상일 뿐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글·사진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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