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희 번역가 "한글 확장성 대단…번역이 근대화·문학계 기여"
"텍스트·사전에 갇히지 말아야"…문해력 저하엔 책 읽기 조언
"AI 시대 우려되지만, 독특한 번역가 존재할 것"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번역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하고, 세계문학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 문학 수준을 끌어올렸죠. 한글 역량과 표현력을 키우는 측면에서도 역할을 했습니다."
김석희(71) 씨는 35년 넘게 350여 권의 해외 저서를 우리말로 옮긴 국내 대표 번역가이자 소설가다.
그는 9일 577돌 한글날을 맞아 한글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김석희 번역가에 대해 "한글의 표현력을 키우고 한글 번역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공적을 소개했다.
고향 제주에 거주하는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창작 이상으로 번역의 역할을 인식하고 평가해준 것 같아 기뻤다"며 "내가 원로여서, 생색내지 못하고 묵묵히 번역하는 후배들을 대표해 상을 받는 기분도 든다"고 말했다.
그는 반평생을 번역 작업에 매진하면서 느낀 한글의 독창성을 "확장성과 융통성"에서 찾았다. 한자 세대인 그는 한글 전용 정책으로 한글 활용의 한계를 걱정한 때도 있었다고 한다.
김 번역가는 "우려와 달리 한글이 표현하지 못하는 말이 없고, 각국 언어를 충분히 커버하는 표현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글로 쓰니 문장도 부드러워졌다"며 "이런 걸 보면서 한글의 확장성과 융통성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한글은 장어처럼 꿈틀꿈틀 세상을 헤쳐 나간다. 글로벌 시대 최고의 언어이자 문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불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1979년 친구의 부탁으로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를 처음 번역했지만, 1987년부터 본격적인 번역가의 길을 걸었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도 했다. 초기엔 번역과 소설 창작을 오가다가 소설집 '이상의 날개'와 장편소설 '섬에는 옹달샘'을 발표한 뒤 번역에 매진했다.
그는 번역가로 나선 계기에 대해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지던 1987년에 6월 항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며 "독재 군사정권 시기 금서로 묶인 책이 많았는데, 이제 세상이 좀 좋아지겠다 싶어 실천문학사가 제주 4·3을 다룬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의 '화산도'(5권)를 출간한다며 번역을 제안했다. 이듬해 4월 3일 출간된 이 책으로 주목받은 게 시작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이후 수많은 해외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며 '스타 번역가'로 자리 잡았다. 대표 번역서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비롯해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쥘 베른 걸작선'(전 20권) 등이 있다.
그는 "이름을 알린 건 '로마인 이야기'이고 2009년 서울에서 제주로 귀향할 때 집터 장만할 땅값을 만들어 준 건 힐러리 클린턴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라고 웃음지었다.
올봄에는 SF(과학소설)·판타지 문학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모험소설 5권을 번역해 펴냈다. 10년 전 출간한 '셜록 홈스' 시리즈 등에 이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다.
그는 "손주에게 읽히려고, 할아버지 역할을 하려고 손을 댔다"며 "쥘 베른이 책을 쓰던 19세기 과학 지식이 지금 와서 보면 불필요하거나 오류도 있어 그대로 번역하면 지루해 잔 가지치기를 했다. 문장을 훼손하지 않고 살리되 불필요한 문장만 정리했는데 호응이 좋다"고 했다.
이번에 번역한 5권 가운데 '15소년 표류기'로 알려진 작품은 프랑스어 원제인 '2년 동안의 방학'(Deux ans de vacances)으로 바로잡았다.
"1896년 일본에서 번역된 제목을 그대로 따랐는데,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에게 원제목을 제대로 알려주는 게 온당한 것 같았죠."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외국어에 능한 김 번역가는 유려한 번역을 위해선 동서양 언어를 두루 익히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말로 옮길 때) 여러 언어로 된 번역본을 살펴보면 번역의 질이 훨씬 좋아진다"며 "홑눈이 아니라 겹눈으로 번역하는 차원이다.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가능하면 서양어와 동양어를 하나씩 공부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번역 작업 시 직역과 의역을 오가며 조화를 이루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어렵다면서 "텍스트와 사전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사전 낱말에 따라 직역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엉터리 번역처럼 생각하는데, 번역도 이런 부분에서 좀 열려야 해요. 텍스트에 갇히지 말고 원서 속 맥락에서 새로운 개념을 떠올릴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있죠."
김 번역가는 청소년들의 문해력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데 대해선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읽으면 지나가는 정보가 되지만, 책을 읽으면 눈에 붙들어 매 머릿속으로 순화하는 과정이 있어 내 것이 된다"며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면 '책은 기억과 상상의 확장'이다. 기억은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게 만들고 상상은 미래를 내다보며 통찰하게 한다. 이걸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줄임말 등 신조어가 세대 간 소통을 방해하고 한글 가치를 훼손한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세상이 앞서가는 사람과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조화를 이루듯이 문자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짚었다.
그는 "예컨대 보수적인 스타일로 문장 하나를 또박또박 쓰는 작가가 있고, 현실에 따라가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도 있다"며 "후자의 경우는 해독하고 읽어내는 독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언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전해나가니 열린 마음으로 봐줘야 한다"고 했다.
번역가는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미래 시대에 사라질 직업군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10여년 전엔 번역기가 인간 상상력을 따라오기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AI 발전 속도를 염두에 두면 인간 번역이 기계에 따라잡히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다만 "현실에 기반한 지식을 넘는 독특한 번역가는 존재할 것이고, 앞으로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다양한 직업군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그는 15년 전 번역해 30쇄를 찍은 '모비 딕'을 새로 다듬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했다.
"올해 안에 내려는데 이 책은 (제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읽힐 '모비 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는 평소 자신에게 번역이란 "장미밭에서 춤추기"라고 빗대곤 한다.
"장미는 아름답지만 가시가 있죠. 장미밭에서 춤을 춘다는 건 가시에 찔리면서도 굉장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란 의미랍니다."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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