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그렇게 세포와 근육은 기억한다

김희국 기자 2023. 10. 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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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근대5종 이지훈 뇌진탕, 기억 없어도 경기 끝마쳐…지옥훈련으로 몸이 기억
메달 떠나서 진정한 승자…선수 대부분 그런 과정 거쳐

기자는 신참 시절 스포츠 분야를 취재했다. 처음으로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취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부산의 한 여중팀이 전국대회를 휩쓸어 금메달이 유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팀 관계자로부터 자랑스러운 부산의 여중생들을 신문에 꼭 소개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다른 일정으로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경기장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컴컴한 곳에서 몇 명의 선수들이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통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당시 스포츠 취재 경험이 일천했던 기자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짠했다. 도대체 어느 시·도 선수들인데 저렇게 서럽게 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선수들을 뒤로하고 경기장에 들어가 부산팀 코치를 찾았다. 코치는 경기장 한편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란 말만 반복했다. 아뿔싸. 계단 아래서 울던 선수들이 기자가 애타게 찾던 부산의 여중팀이었다. 결승전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팀에게 일격을 당해 선수들은 계단 아래서 통곡했고, 코치는 경기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프로야구 선수의 신인 시절 일화다. 사직야구장에서 정규리그 경기를 했는데, 그날따라 그 선수가 수비에서 유독 실책을 많이 저질렀다. 프로야구 선수라고 하기엔 민망한 정도의 실책으로 팀 패배에 빌미를 제공했다. 기자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경기를 전달하는 게 임무다. 그런데 그날 기자에겐 직업정신보다 ‘팬심’이 더 강하게 작동했다. 경기가 끝나고 그 선수를 직접 찾아갔다.(참고로 그 선수와 나름 친분이 꽤 있었다) 라커룸 일대를 수색(?)하다 다른 선수에게서 행방에 관한 제보를 받고 기자가 급습한 곳은 웨이트장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선수 대부분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했는데 그 선수는 웨이트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흙 범벅이 된 유니폼을 그대로 입은 채로. 더욱이 무릎 부근에 핏자국까지 보였다. 수비 실책을 범할 때 넘어지면서 다친 곳이었다. 그 선수보다 더 당황한 건 기자였다. 수비 좀 잘하라고 질책하러 갔다가 위로와 격려를 하고 돌아섰다.

옛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경기장 밖의 선수들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운동하는지, 얼마나 승부욕이 강한지 대략 느껴질 것이다. 스포츠계에 ‘경기를 즐겨라’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같은 말들이 유행한다. 기자는 이 말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경기를 즐겨라’의 경우 은퇴한 프로농구 레전드이자 현직 예능인인 서장훈이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농구를 즐겨본 적이 없고 항상 전쟁이라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고. ‘졌잘싸’는 더더욱 그렇다. 이 말의 취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스포츠는 승패를 결정지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하다못해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하는 승부욕을 지닌 선수들에게 ‘졌잘싸’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졌을 때 패배를 받아들이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다.

16일 동안 펼쳐진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막을 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졌잘싸’가 등장했고, 경기장 한편에서 대성통곡한 선수도 있었다. 기자의 개인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선수가 얼마나 ‘극한 직업’인지 가감 없이 보여준 주인공은 근대5종의 이지훈이었다. 경기 전 연습 도중 낙마로 충격을 받은 이지훈은 극심한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감독의 만류에도 이지훈은 출전을 감행해 승마 펜싱 수영 사격 달리기까지 모두 소화하고 개인전 은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를 마치고 이지훈이 처음으로 한 말은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합이 끝났다”였다. 심지어 이지훈은 시상대에 선 것도, 인터뷰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선수가 어떻게 경기를 치렀을까.

지유찬이 수영 남자 자유형 5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21년 만에 소환된 부산의 수영 영웅 김민석은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이 목숨 걸고 훈련하면 세포와 근육 하나하나가 기억합니다. 경기를 하면 어느 순간 육체적 한계에 도달하는데 그때는 머리와 정신력이 아니라 세포와 근육이 알아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지옥훈련을 하는 겁니다.”


아마 이지훈은 머리가 아니라 지옥훈련으로 단련된 세포와 근육이 알아서 경기를 치렀을 것이다. 거기다 승부욕까지. 이지훈은 극단적인 사례지만, 대부분의 선수는 경기장에 나서기 전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정도의 땀과 눈물을 흘린다. 세포와 근육이 훈련량을 기억할 만큼. 그래서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승패와 메달을 떠나 이미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진정한 승자들이다.

오는 13~19일 전남에서 제104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자신과의 싸움을 거쳐 경기장에 선 선수들에게 박수를….

김희국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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