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강물 같은 세상서 펼친 배려와 용서…나림의 사랑은 깊다
- 그의 고향 하동서 문학정신 조명
- 2007년부터 해마다 문학제 개최
- 본지 작년부터 공동 주최로 활력
- 문학 속 애정관·인간관계 되짚고
- 프랑스 발자크와 연관성도 소개
- “젊은 세대에 작품 전할 궁리하자”
- 문학상 이성열 씨 “꿈도 못꾼 일”
북천 코스모스는 과연 예뻤다. 이 고장에서 나고 자라 대문호가 된 나림 이병주(1921~1992) 작가가 짓는 흐뭇한 웃음이 활짝 핀 가을 코스모스 밭 위로 내려앉는 듯했다.
경남스틸과 함께하는 2023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가 지난 7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길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기념사업회·국제신문·KBS진주방송 공동 주최로 열렸다. 이 문학제는 하동군·경상남도·BNK금융그룹·경남스틸이 후원한다. 작가 이병주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국 문단이 목격하지 못한 소설 문학의 새 경지를 열어젖혔다.
그는 젊은 날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했고, 일제강점기 말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 교수를 거쳐, 국제신보(현재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국제신보 시절 그는 지면을 혁신하고, 반독재·민주주의 수호 기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4·19 혁명을 탁월하게 보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필화를 겪어 2년 7개월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온 뒤 44세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문단에 큰 충격을 안기며 문학인으로서 출발했다.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그를 기리는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는 2007년 시작해 해마다 열린다.
▮고향 마을에서 펼쳐진 문학 잔치
오후 2시 시작한 개회식에서 ㈔이병주기념사업회 이기수 공동대표(한국법학원장·전 고려대 총장)는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의 활력이 크게 높아졌다. 이병주 작가께서 봉직했던 국제신문이 지난해부터 공동 주최를 맡으면서 이런 변화는 더욱 도드라졌다. 하동군의 후원 또한 참으로 고맙다. 문학제가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개회사를 했다.
강남훈 국제신문 사장은 환영사에서 “국제신문 기자 출신인 저는 대선배이신 이병주 작가를 떠올리면 가슴이 뜨겁다. 이병주 선생은 한국 문단의 우뚝한 별이면서 부산 울산 경남의 ‘마음’을 잇는 문화 상징이다. 현재 국제신문은 해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등 독자·시민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 창출에 힘쓰고 있다. 나림 이병주 선생을 기리는 활동 또한 더욱 열심히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승철 하동군수를 대신해 참석한 하동군 석민아 문화환경국장과 경남도의회 김구연 의원의 재치 있는 인사말 또한 분위기를 한결 흥겹게 끌어올렸다.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석민아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 시절 부모님의 책꽂이에 이병주 작가의 장편소설 ‘비창’이 꽂혀 있었다. 호기심에 꺼내 읽었는데, 소설 속에 ‘하이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뒷날 공무원이 되어 일본에 출장 갔을 때 하이볼을 비로소 맛보았다. 요즘 하이볼이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높다. 이병주 선생의 작품도 하이볼처럼 새롭게 인기를 높일 방법을 함께 궁리하면 좋겠다. 하동군도 더 많이 노력하겠다.”
김구연 경남도의원은 “저의 집이 이곳 하동 북천이다. 저는 이병주문학관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지역 주민 중 한 명이다. 박보승 북천면장님과 함께 참석했다. 우리 고장이 낳은 나림 이병주 선생을 더 잘 기리겠다”고 말했다.
▮올해의 주제는 ‘사랑’
개회식에 이어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병주기념사업회는 올해 주제를 ‘이병주 소설의 애정관과 인간관계’로 잡았다. 이병주 작가는 40대에 작가의 길에 들어선 뒤로 27년에 걸쳐 한 달 평균 1000여 매의 글을 써서, 80권이 넘는 소설책을 냈고, 이와 별도로 수십 권에 이르는 수필집·칼럼 등을 쓴 ‘초인’ 수준의 글쓰기로 유명하다. 분야 또한 역사·문화·고전·정치·예술·여행·기업·사랑 등 방대하기 그지없다. 이런 이유로 그간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주로 역사의식·현대사·사상 등을 주제로 잡았다. 이번에는 ‘사랑’이었다.
주제발표에 나선 이의 면면은 다채로웠고, 이들이 내보인 발표문은 흥미로웠다. 김종회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가 ‘사랑을 말하는 세 가지 소설적 방식-1980년대 초반의 이병주 소설’, 남송우 고신대 석좌교수가 ‘이병주의 애정관과 인간관계’를 기조 발제했다.
정영훈 경상대 교수의 ‘이종문을 위한 변명-‘산하’의 애정관과 인간관계’, 하태영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이병주 문학의 애정관과 인간관계’,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의 ‘문제적 개인과 터무니없는 자유-‘별이 차가운 밤이면’을 중심으로’, 송기정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발자크와 이병주:역사를 보는 시선’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하태영 교수와 송기정 명예교수의 발표 논문은 정보성과 판단할 근거를 좀 더 구체성 있게 제공한 측면에서 청중의 관심을 좀 더 끈 것으로 보였다. 하 교수는 치밀한 조사와 사유를 통해 이병주 문학세계 속 인간관·인생관·사랑관·연애관을 일관성 있게 짚었다. 그는 ‘문학이란 사랑을 배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라는 이병주 작가의 문장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즐거움을 받아안으면서도 음란·방종에 빠지지 않는 락(樂)과 불음(不淫), 삿됨·사특함이 없는 사무사(思無邪), ‘더러운 강물’ 같은 세상에서 펼치는 배려·용서·사랑을 핵심으로 꼽으며 강조했다.
송 명예교수는 프랑스 문학 연구가로서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의 예술세계와 삶이 어떤 점에서 이병주 문학과 만나는지 세심하게 소개해 두 거장에 관한 이해도를 높였다. 심포지엄은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이병주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흥겨웠던 시상식
토론과 발표 열기로 후끈했던 심포지엄 직후 이병주국제문학상 시상식이 이어졌다. 그런데 올해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올해 이병주국제문학상 수상자는 재미문학가 이성열 시인·작가이다. 그는 “대문호 이병주 작가의 이름으로 주는 상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라는 수상소감을 미리 보내왔다. 현재 미국에 사는 그는 이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표와 숙소까지 예약해둔 터였는데, 갑작스럽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 한국으로 오지 못했다. 그의 절친인 재미문학가 신영철 씨가 대신 상을 받았다.
이성열 시인·작가는 시집 ‘바람은 하늘나무’ ‘하얀 텃세’ ‘구르는 나무’, 소설집 ‘위너스 게임’ 등을 펴냈다. 앞서 가산문학상 미주문학상 등을 받았다. 그에게는 상금 2000만 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은 임정연 안양대 교수에게 주어졌다. 임 교수는 최근 이병주 문학 연구에 관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임 교수는 “‘운명의 덫’과 ‘허드슨강이 말하는 강변 이야기 제4막’ 등 이병주 작가의 대중소설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청소년 시절 이병주 작가의 ‘지리산’과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으며 국문학으로 진로를 정한 저에게 이 상은 더없는 영광”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병주국제문학상 경남문인상은 하아무 소설가(박경리문학관 사무국장)가 받았다. 하 작가는 경남 문단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면서 창작 또한 왕성하게 해 왔다. 그는 최근 펴낸 소설집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 작가는 “어떤 시인이 한 말을 떠올린다. 어떤 사물이나 근원에 다가가려면 거슬러 가야 한다. 따라가면 안 된다. 지리산 자락에서, 박경리문학관에서 일하면서 배움도 얻고 후회와 염려도 한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와 함께 제9회 디카시 공모전에서 황기모 씨가 대상을 받고, 제4회 스마트소설 공모전에서 김태라 씨가 대상을 받는 등 많은 이가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이병주 문학’의 이름으로, 이병주 작가의 고향 마을에서.
▶공동 주최 : ㈔이병주기념사업회·국제신문·KBS진주방송
▶후원 : BNK금융그룹, 경남스틸, 하동군,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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