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남매 중 막내였던 외삼촌, 제 어머니 생신날 전사했죠”
- 성인 된 훈스 인니 독립전쟁 참전
- 귀국 얼마되지 않아 한국행 택해
- 전투 중 아군 수류탄 오발로 숨져
- 누나 생일잔치 다음날 부고 소식
- 연락 끊긴 외삼촌 애인 최근 재회
- 어머니 참전용사협회 회원 활동
- 함께 동참하며 한국에 관심 생겨
“우리 가족이 외삼촌의 전사 소식을 들었던 날을 아직 기억합니다. 외삼촌의 누나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저의 어머니 생일 다음 날이었어요. 어머니의 생일 파티에는 모든 가족이 모였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당시 전쟁터에 있던 외삼촌을 모두 그리워했고 보고싶어 했어요. 생일 파티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삼촌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네덜란드 중부 플레보란드의 비딩하우젠에서 만난 요스예 쿠넨-반 더 볼(여·80)은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외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요스예의 여동생인 에리 반 더 볼(여·74)도 인터뷰에 함께했다. 네덜란드 반 호이츠 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훈스 트위스터링이 그들의 외삼촌이다.
“외삼촌은 여섯 남매의 막내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를 포함해 5명의 누나를 두었죠.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이 태어났을 때 트위스터링 가의 대를 이을 수 있어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두 번의 전쟁
훈스는 1928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여섯 남매의 막냇동생이었던 그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되자 의무 복무를 위해 군에 입대했다. 그가 투입된 곳은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 전쟁이 벌어졌고, 그도 1947년부터 2년간 이곳에서 싸웠다.
“외삼촌은 1949년 인도네시아에서 전쟁을 끝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여섯 살 때인데 그때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있어요. 당시 외삼촌 집 주변 지역엔 국기가 가득했습니다. 네덜란드 유명 밴드 ‘더치 스윙스 칼리지 밴드’가 인근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을 환대하며 연주하기도 했어요.”
온 동네가 그의 귀국을 반겼다. 정작 훈스는 인도네시아의 전장에서 많은 것을 겪은 탓인지 답답해했다. 다섯 누나의 품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해외로 눈을 돌렸고, 한국전쟁 참전을 택했다.
그는 1950년 10월 26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한국으로 가는 선박 ‘죠이더 크로이스(zuider kruis)’를 탔다. 이는 남쪽 하늘의 은하수 가운데 위치하며 십자 모양을 이루는 네 개의 별인 남십자성을 뜻한다.
“당시 외삼촌은 또다시 외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외할아버지가 한국에 가면 진짜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외삼촌이 반은 죽지만 반은 산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꼭 살 것처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적군의 급습에 전사
훈스는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했고, 한국에서도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그가 전쟁 통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좋은 내용이 주를 이뤘다. “외삼촌의 편지에서 그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전쟁에서 상황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나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좋은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1년 6월 1일 새벽 4시40분 강원 인제 인근. 150명 정도로 구성된 적군이 훈스가 소속된 중대를 급습했다. 네덜란드 군인은 포병 지원으로 이들을 격퇴하려고 했다. 2시간가량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적군은 물러났다. 아수라장이 된 전장에서 훈스를 포함한 6명의 네덜란드 군인이 전사했다.
이날은 요스예의 어머니 생일이자, 훈스가 전사한 날이 돼버렸다. 슬픈 소식은 빠르게 네덜란드로 닿았다. 모든 가족이 요스예의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고 파티를 즐긴 다음 날 훈스의 전사 소식이 집에 도착했다.
“외삼촌이 전사했을 당시 저는 여덟 살에 불과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외삼촌이 아군이 쏜 총에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했어요. 훗날 네덜란드 국방부에 문의해 보니 외삼촌은 아군의 수류탄 오발로 돌아가셨더라고요.”
요스예의 외할아버지는 아들 훈스가 전우와 함께 한국에 머무르도록 결정했다. 죽은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훈스는 그렇게 부산 남구의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헤이그의 지역 성당에서는 그를 기리는 장례 미사가 열렸다.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이 전우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인데, 아들의 죽음은 정말 충격이었겠죠. 장례 미사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외삼촌의 여자친구도 참석했습니다.”
▮끊이지 않는 기억하기
훈스는 애초 인도네시아에서 전쟁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여자친구였던 티니와 함께 뉴질랜드로 이주를 계획했다. 두 사람이 약혼한 적은 없지만, 요스예의 어머니는 티니를 항상 약혼자라고 부를 만큼 가깝게 지냈다.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티니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5년 전에 수소문해 티니를 찾았고, 에리가 만나러 갔었죠. 혹시나 싶어 외삼촌의 사진첩을 들고 갔는데 티니도 외삼촌의 사진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이 인도네시아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훈스 가족과 재회한 티니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티니는 훈스가 전사한 뒤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훈스와 결혼했더라면 어떤 삶을 보냈을까 등을 항상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티니는 여전히 훈스를 그리워했다.
“아직도 티니와 연락하고 있어요. 티니는 30년 전쯤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불편합니다. 3년 전쯤 집을 정리하고 요양원으로 갔다고 해요. 우리에게 가끔 전화해 한번 놀러 오라고 합니다. 티니는 트위스터링 가와 가족이나 다름 없어요.”
티니 뿐만 아니라 요스예의 어머니도 외삼촌을 많이 그리워했다. 요스예의 어머니는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VOKS)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했다. 1992년 막내 여동생과 함께 훈스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기도 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하루하루를 사진 일기로 남겼다.
“어머니는 외삼촌의 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자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한 것이죠. 그때 어머니는 안도감을 많이 느끼셨던 것 같아요.”
요스예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자, 요스예도 VOKS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SNS에 훈스 추모 페이지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자료를 모으고 있다. 훈스의 훈장을 찾거나 티니와 연락하는 일 등도 이때부터 진행됐다.
“어머니가 항상 한국과 외삼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국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관심이 더 강해졌습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면 꼭 부산을 찾아 네덜란드 묘지에 헌화해 달라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답신은 아직 받지 못했어요. 또 5월 4일이 되면 가족이 화환을 준비해 추모하곤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5월 4일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네덜란드 군인을 기리는 날이다.
요스예도 외삼촌의 묘지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잠깐 그 시간을 미뤘다. 향후 VOKS를 통해서 부산을 방문할 계획이다. “평화를 지키고자 했던 외삼촌을 존경합니다. 외삼촌을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하는데, 저나 에리가 죽고 나면 외삼촌이 어떻게 기억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됐든 외삼촌을 기억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네덜란드=
영상=김태훈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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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협조 : 재한유엔기념공원관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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