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멕시코 4강 신화 만든 ‘붉은 악마’의 원조...박종환 전 감독 별세

성진혁 기자 2023. 10.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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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던 박종환(87)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7일 밤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1년여 동안 경기 양주시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내다 최근 코로나에 감염된 뒤 패혈증 증세를 보인 끝에 숨졌다.

8일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놓인 고(故) 박종환 감독 영정. /뉴스1

황해도 옹진군 태생인 박 감독은 1945년 가족과 고향을 떠나 강원도 춘천에 정착했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중학생 무렵까지 지역 미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 보이’ 생활을 했다. 이때 농구, 축구 등 스포츠를 접하며 재능을 발견했다.

축구로 진로를 잡은 그는 춘천고와 경희대, 대한석탄공사에서 선수(수비수)로 뛰었다.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적이 있었지만, 스타 플레이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30세에 은퇴한 이후 약 10년 동안 고교 축구팀 네 곳의 감독을 역임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일궈 두각을 나타냈다.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1975년 실업팀인 서울시청 사령탑에 올라 14년간 재임하면서 지도자로 명성을 떨쳤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는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 세계선수권에 두 차례 출전했다. 특히 1983년 6월 멕시코 대회 땐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이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성인 대표팀이 4강에 오르기 전까지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대회에서 한국이 거둔 최고 성적이었다.

1983년 박종환(왼쪽) 감독이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 신화를 일구고 귀국, 꽃목걸이를 걸고 시내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박 감독은 한국 사상 첫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대회 4강 진입을 이끌었다. /대한축구협회

한국은 멕시코 세계청소년 선수권 조별 리그 첫 경기였던 스코틀랜드에 졌으나 개최국 멕시코에 이어 호주를 잡았고, 8강 토너먼트에선 우루과이까지 꺾고 4강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1대2로 역전패하면서 결승 문턱에서 물러났다.

당시 ‘박종환호’의 조직적이면서 공격적인 축구에 국내 팬들은 열광했다. 외국 언론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그라운드를 휘젓는 한국의 기동력에 감탄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는 표현을 썼다. 후일 한국 축구에 ‘붉은 악마(Red Devils)’라는 별명이 붙게 된 계기였다.

혹독하고 강압적인 방식의 훈련을 고수했던 박 감독은 대회 장소인 멕시코가 해발 2000m 고지대라는 점에 착안해 국내에서 선수들에게 감기용 마스크를 착용하고 러닝을 시켰다. 대회 기간엔 현지에서 구한 김치와 돼지고기로 김치찌개를 만들어 선수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한국 대표팀이 묵었던 숙소의 멕시코인들이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박 감독을 한국 팀 요리사로 착각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 감독은 후일 국가대표팀과 프로팀 감독을 지낼 때도 가끔씩 선수단에 김치찌개와 생선 매운탕을 끓여줘 인기를 끌었다.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났는데, 박 감독은 ‘불 조절’을 비결로 꼽았다고 한다.

박 감독은 멕시코 4강 신화를 계기로 성인 대표팀 사령탑으로 승격해 1990년대 중반까지 총 5차례 지휘봉을 잡았다. 1996년 12월 아시안컵 8강이 마지막 성적이었다.

박 감독은 국가대표 감독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프로 사령탑으로는 또 다른 성공 스토리를 썼다. 1989년 일화 천마 창단 감독을 맡아 1993년부터 K리그 3연패(連霸)를 일궜다. 일화 감독 시절 춘천고 후배이자 손흥민(토트넘)의 아버지인 손웅정씨를 일화에 입단시키기도 했다.

박 감독은 대구 FC 창단 감독(2003~2006년), 성남 FC 감독(2013~2014년), K3리그의 여주세종축구단 총감독(2018~2020)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2001년)을 역임하며 초창기 여자 축구가 국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도 했다.

평생을 축구에 바쳤던 그의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거나,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기억력 감퇴에 이어 치매까지 심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7일 밤 한국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며 사상 첫 3연패(連霸)를 일궜다.

유족으로는 딸 성숙, 아들 재호씨, 빈소는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장례식장 9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09시30분, 장지는 남양주시 에덴 추모공원, (02) 79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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