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도시의 일부, 매일 오가는 사람에게도 책임을 져야 한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賞)의 심사위원회는 2023년 수상자로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70)를 선정하며 ‘재능 있는 건축가는 때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기도 한다’고 밝혔다. 치퍼필드의 건축은 화려하고 과장된 형태보다는 절제된 디자인으로 주변 환경에 어우러지는 것을 추구한다는 얘기였다. 모든 건물을 곡선으로 만들어 해당 건축물만 봐도 건축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설계자 자하 하디드, 삼각·사각형과 원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노출 콘크리트 재료를 선호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치퍼필드 작품이 대비되는 이유다.
지난달 26일 한국을 찾은 치퍼필드와 만나 인터뷰했다. 프리츠커상 수상을 기념해 방한한 그는 전날 그가 설계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용산 본사에서 국내 건축계 주요 인사와 일반 관객, 아모레퍼시픽 임직원 400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튀는 건축’보다 ‘시대와 사회에 녹아드는 건축’을 강조했다. “건축은 그림이나 조각 같은 독립된 예술이 아닌, 도시와 환경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건물을 매일 봐야 하는 시민에게도 기여하고 싶었다
치퍼필드는 건축가가 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설명했다.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무슨 뜻인가?
“매일 이 건물을 오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가에게는 의뢰한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 법적 계약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이 건물을 매일 봐야 하는 시민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특이하고 파격적인 것이 예술로 치부되는 세상인데 너무 ‘특성 없는’ 건축이 되는 건 아닌지.
“건물이 있기 전보다 건물이 생기고 난 뒤 주변 환경이 더 좋아졌느냐,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졌느냐를 따져 봐야 한다. 특별한 순간이나 판타지를 경험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수한 건축이 아주 일상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이 건물을 매일 봐야 하는 시민에게 기여하는 건축물을 설계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물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평소 “나는 요란하고, 스펙터클한 것보다 ‘차분한 품격’을 선호한다”고 말해왔다. 차분한 품격이란 무엇인가?
“일본 문화는 음식의 맛이나 제품의 기능 등에 있어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내재적인 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특별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피상적인 것이 아닌 내재적 가치를 끌어올린 것이 차분한 품격이다.”
1985년 자신의 회사를 설립 후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미야케의 쇼룸과 지바현 미술관을 건축하는 등 수년간 일본에서 활동했다. 이때 ‘차분한 품격’을 배웠다는 그는 건축물을 지을 때 항상 그 건축물을 짓고 십 년 뒤, 이십 년 뒤의 모습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 이후의 변화에도 쉽게 퇴색하지 않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산 한가운데 ‘달항아리 미학’을 심다
치퍼필드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을 가로·세로 100m로 설계, 로비엔 사방에 큼직한 출입구를 만들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달항아리처럼 한가운데를 비워 놓은 것이다. 외관에 촘촘하게 심어진 알루미늄 차양 2만1500개는 낮 시간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밤 시간 건물 내부에서 뿜어지는 빛을 은은하게 분산시킨다. 5층을 비롯한 3개 층에 한옥 중정(中庭)을 옮겨 놓은 듯한 정원을 배치해 쉽게 휴식 공간으로 이동하고, 동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아모레퍼시픽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가치를 느끼게 하고 싶었나?
“이 건물이 ‘회사의 본사’라는 기본적인 기능에 맞춰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건물로 만들었다. 건물을 높다란 타워(tower)형이 아닌 수평적인 형태로 만들어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게 했다.”
건물 로비와 5층에 마련된 정원에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는 “겉만 화려하게 꾸민 건물은 일주일 정도 ‘멋진 건물에서 일한다는 기쁨’을 줄 뿐이다. 내재적 가치를 갖춘 건물은 구성원들이 건물을 이용하면 할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건축을 꿈꾼다
치퍼필드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이기도 하다.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작업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나?
“나는 전 세계적인 주거 문제나 환경 오염 같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 공공 주택 프로젝트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도시 설계 등이다. 현재 스페인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환경과 교통, 자연환경 등을 고려한 건축 설계 조언을 하는 재단을 운영 중이다.”
-환경 문제도 건축가의 책임에 포함되나?
“과거엔 ‘상품의 질’만이 평가의 기준이었다면 이젠 ‘과정의 질’도 중요해졌다. 윤리·환경적인 과정을 거쳐 건물을 지었는지도 따져봐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원을 ‘소비’하기만 했다. 건축가들 역시 사회의 변화에 맞춰 앞으로 남은 자원을 얼마나 현명하게 쓸지 고민해야 한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195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남서부 데번 시골 농장에서 자랐다. 1980년 영국 건축협회 건축 학교(AA스쿨)를 졸업, 더글러스 스티븐·노먼 포스터·리처드 로저스 같은 거장 건축가 사무소를 거치면서 실무를 익혔고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세웠다. 이후 일본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유럽과 미국, 아시아 곳곳에 공공건물과 박물관, 주거·상업·업무 시설까지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해 왔다.
치퍼필드는 오래된 건축물을 허물지 않고 복원, 역사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독일 베를린 신(新)박물관을 설계할 땐 2차 대전으로 훼손된 벽의 잔해를 그대로 복원해 드러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을 둘러싼 옛 건축물을 전통 공예 장인들과 손잡고 복원해 대중에게 개방하기도 했다. 중국 상하이의 웨스트번드 미술관, 스페인 발렌시아의 아메리카스 컵 빌딩, 일본 이나가와 묘지 예배당도 치퍼필드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미국 뉴욕 5번가에 위치한 시계 회사 롤렉스의 본사 사옥 재건축 작업도 진행 중이다. 서울 성수동 크래프톤의 신사옥 설계도 치퍼필드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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