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도 슬프나 우리 의병 불쌍”… 한글로 쓴 여성들 독립 열망

이소연 기자 2023. 10. 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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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문중(門中)과 함께 만주로 떠나온 여성들에게 한글은 기록할 수 있는 힘을 줬다.

고순희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논문 '만주 망명과 여성의 힘'에서 "'산새타령'은 윤 의사가 만주에서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 앞장서서 이들을 거둬 먹인 독립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였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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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여성들 ‘만주 망명 가사’
윤희순 의사, 항일인재 양성 앞장
“아무리 여자라도 이때 쾌설해 보자”… 이상룡 부인 김우락 여사 작품도
학계 “강점기 여성 역사의식 재평가”

일제강점기, 문중(門中)과 함께 만주로 떠나온 여성들에게 한글은 기록할 수 있는 힘을 줬다. 이들이 쓴 ‘만주 망명 가사’는 조선 부녀자들이 한글로 남긴 문학 ‘내방가사(內房歌辭)’를 대표하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9일 한글날을 맞아 일제강점기 우리말로 독립 의지를 노래한 만주 망명 가사를 살펴봤다.

“이내 몸도 슬프나 우리 의병 불쌍하다/배고프다 한들 먹을 수 없고 춥다 한들 춥다 할 수 없네/…엄동설한 찬바람에 잠을 잔들 잘 수 있나/동쪽 하늘 밝아지니 아침거리 걱정이라”(‘산새타령’ 중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의 초상화. 윤 의사는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뒤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항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이 무렵 항일 의병을 지도하며 쓴 가사가 ‘산새타령’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923년 여성 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1860∼1935)가 만주로 망명해 학당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이끌던 시절 지은 가사다. 1911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윤 의사는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시에 학당을 세웠다. 이곳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는 약 50명. 윤 의사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들에게 먹일 한 끼 아침거리를 더 걱정했다. 타향에서 매일 아침 중국인의 집을 돌며 끼니를 구걸하는 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윤 의사는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일제와 싸울 테니, 당신들은 우리에게 끼니를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당당한 태도가 묻어나는 말이다. 고순희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논문 ‘만주 망명과 여성의 힘’에서 “‘산새타령’은 윤 의사가 만주에서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 앞장서서 이들을 거둬 먹인 독립운동의 실질적 지도자였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했다.

“남녀가 평등하니/…법국(프랑스)의 나란 부인(롤랑 부인) 독립전쟁에 성공하고/…밝고 밝은 이 세상에 여인으로 태어나/이전 풍속을 지키다가 무슨 죄로 고생하겠나/…순풍 불어 환고국 하올 적에/그리운 부모 동생 악수할 것이니”

의성김씨 문중의 김문식과 혼인한 이호성 여사(1891∼1968)가 쓴 가사 ‘위모사’의 일부다. 만주로 떠나는 딸을 걱정하는 친정어머니에게 바친 글로, 타향에서의 삶에 대한 우려보다 남성과 동등하게 힘을 보태 독립할 그날에 대한 염원을 밝히는 등 독립을 향한 굳은 의지를 담았다. 최형우 대구한의대 교수(기초교양)는 논문 ‘근대 조선을 바라보는 이호성의 시선과 위모사에 담긴 여성 의식’에서 “여성에게 제한적 역할만 부여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 민족으로서 해야 할 역할과 임무에 적극적이었던 여성의 모습을 이 가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가사는 만주 망명사(史)에서 소외돼 왔던 여성들의 심경과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상주 이상룡의 부인인 김우락 여사가 1911년 10월 만주에 정착한 직후 쓴 ‘해도교거사’. 가로 10m, 세로 30cm 크기 두루마리에 줄글로 기록한 가사엔 고향 안동을 떠나 만주에 정착하기까지 독립운동을 한 과정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담겼다. 고성이씨 문중 제공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상주 이상룡(1858∼1932)의 부인 김우락 여사(1854∼1933) 역시 가사로 만주에서의 삶을 기록했다. 1911년 10월 만주에 정착한 후 지은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가 대표적이다. 김 여사는 이 가사에서 “월국(越國) 의사 깊이 드니/철석같이 굳은 마음 누가 말릴까/…독립국권 쉬이 오려니/아무리 여자라도 이때 한번 쾌설해 보자”고 썼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여성으로서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 이 글은 ‘독립운동가의 부인’으로만 알려졌던 김 여사의 목소리를 드러낸 결정적 사료로 꼽힌다. 정부는 이 사료를 바탕으로 2019년 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강윤정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말로 지은 문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자 했던 여성들의 역사의식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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