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F’ 구분하는 글꼴 만든 교수들
“세종대왕이 한글 반포 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고 할 것 같아요.”
박재갑(75)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 암연구소에서 말했다. ‘대한의원 개원 칙서’(국가등록문화재 제449호) 속 한글에 매료돼, 김민(62)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 등과 함께 디지털 글꼴 ‘한글재민체’를 만들어 배포한 게 벌써 3년 전.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主權在民), 한글도 국민의 것이라는 취지로 이 글꼴을 개발해 무료로 배포해 왔다. 올해 한글날은 이날부터 무료로 배포되는 글꼴 ‘한글재민체 5.0′ 덕분에 보다 특별하다. 박 교수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다 불러내서 다시 쓰게 했고, 세계 어느 언어든 모두 표기할 수 있게 만든 글꼴”이라고 설명했다.
‘한글재민체 5.0′은 외국어 발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 창제 때 사용됐던 가획 부호 등을 활용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R’과 ‘L’, ‘B’와 ‘V’, ‘P’와 ‘F’ 발음을 구분해 표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음 94개, 모음 30개, 성조와 첨자 등 기본 134자로 구성했다. 기존 한글의 홑자음 등에 획이나 점 등을 더하는 방식으로 문자를 만들었다. 김민 원장은 “한글재민체를 통해 다음 세대 아이들은 외국에 가서 커피를 ‘커피’라고 그대로 발음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다른 특징은 모아쓰기가 아닌 풀어쓰기라는 점. 찌아찌아족을 위한 한글 교과서를 집필한 이호영(60)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이번 표기 체계 개발에 큰 힘을 보탰다. 그는 “한글이 대단히 뛰어난 문자인데, 모아쓰기를 하다 보니 영어, 로마자 등을 적을 때 한계가 있다. 한글이 세계화되려면 풀어쓰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국내에서도 풀어쓰기 체계로 바꾸자는 주장은 아니다. “해외의 대부분 언어는 모아쓰기보다 풀어쓰기에 더 익숙하다. 한글재민체가 국내에선 보조 역할로 사용되고, 한글을 배우고 싶은 외국인들에게 도움이 크게 될 것이다.”
한글이 창제 당시 취지대로 사용되고, 세계화의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수년 전 젊은 세대 사이에선 ‘ㅅ’ 발음을 영어 ‘th’의 발음인 ‘θ’라고 표기한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김민 원장은 “한글 파괴에 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한글재민체’가 이를 막는 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두 교수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된 ‘한글재민체’는 이호영 교수와 김미애(44) 수원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가 합류하며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됐다. 박재갑 교수가 밝힌 이들의 목표는 “자국 문자를 컴퓨터로 사용하기 어려운 나라가 있다면, 그들이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윤디자인그룹이 제작한 ‘한글재민체 5.0′을 워드프로세서 등에 입력할 수 있는 입력기는 이달 중순부터 배포될 예정이다. ‘한글재민체 5.0′는 다음 주소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s://font.co.kr/collection/sub?family_idx=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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