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화백과 결혼, 열혈 예술인들과의 만남

2023. 10. 9.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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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하다] 아내는 씩씩하고 가난에 굴하지 않았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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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해방되기 바로 전날 딸 없는 집 맏딸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억센 데다 남자처럼 자랐다. 남자의 강점과 여자의 섬세함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기계체조를 해서인지 손아귀의 힘도 대단했다. 일처리도 섬세한 데다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거침이 없이 신속했다.

고집이 셌으나 알고 보면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모든 것에 굴하지 않는 성격 탓이었다. 그럼에도 성당 다니는 일에는 빠트림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옛 그녀인 지영이가 평소 언니처럼 지내는 건희와 셋이서 무교동에서 만나 술을 먹었더랬다. 한창 때 자유인 시절이었으니 내가 무슨 말인들 못했을까?

아마도 나는 감옥소를 나와서도 노동자 생활 속으로, 노동자 운동으로 생활의 방향을 잡고 있던 터라, 아마도 서울 상대 학생운동의 주축이었던 김건희의 남동생 김대식이 노동자 운동과 거리가 먼 사회로 나가 생활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몰아세운 게 건희의 마음을 건드렸던가. 나와 헤어져 지영이 수유리 집에 가서도 어쩐 일로인지 몹시 서러워해 하며 오래도록 울었던가 보다.

왜 내가 그녀를 서글프게 하였는지는 지금도 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묻지도 않는다. 답은 나의 궁금함에 비해 너무나도 단순 간단하겠기에 말이다. 누가 한때의 슬펐던 일을 되돌려 말하겠는가.

하루하루가 노동조합 업무로 바쁘게 지내던 어느 가을날이다.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의 피아노 담당자인 인천 여성과 몇 번 만나던 때의 일이었다. 정치학과 한참 후배이자 나와 허물없이 지내는 마산내기 한석태가 시흥의 노동조합으로 나를 찾아와 나에게 흰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건희 누님이 나에게 전해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도저히 그 의미를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약속을 정해놓고 신촌네거리에서 건희를 만났다. 가뿐한 마음으로 건희가 좋아하는 맥주도 같이 마셨다. 자유로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유스러웠을 뿐이었다. 밤늦어 건희와 둘이 평창동 언덕 위 건희의 자취집으로 갔다.

자취집은 단순하고 단출했다. 조그마한 방 하나에 연탄 부뚜막이 하나. 조금 후 나는 건희의 자취방을 나와 평평하게 다져놓은 북한산 아래 텅 빈 벌판 한 가운데에 건희와 함께 앉았다. 누워도 보았다. 별이 넓은 하늘 가득했다. 총총한 별빛 하늘 아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경계선과 허물이 한 톨도 없었다. 우리에게 왔다가 지나간 삶의 역사가 있는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그날 그 시각, 하늘의 별들도 우리 둘 곁 사방 들판과 바위와 숲과 소곤대고 있었다.

그 뒤로 건희는 시흥 내 자취집에도 자주 찾아왔다. 나는 그때부터 건희를 '건' 한마디로 불렀다. '건아!'라고. 그 먼 평창동에서 찾아와 방도 닦아주고, 밥도 반찬도 해주고, 빨래마저 해주고 갔다. 목발잡이 목대를 떼어내기 전후의 시간인데, 그녀도 그가 다니던 정릉의 고려중학교 미술 강사의 일을, 처우개선을 위한 시비 끝에 거뒀던 때였다.

건희는 홀로 노동조합 일을 하는 나를 찾아와 동무해 주었던 것이다. 물난리로 난장판이 된 시흥천 동네를 나와 함께 두루두루 살피며 다녔다. 우리에겐 둘만의 산보이기도 했다. 모든 게 고마웠다. 언젠가 부터인지 나의 마음에는 나도 그녀에게 뭔가로 보답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노을이 짙게 드리워 있던 어느 날 저녁, 함께 시흥동 옛 국도를 걸어 옛 다리 위를 지나갈 무렵, 나는 잠시 다리 위에 멈추어 서서 나직하게 건에게 말했다. "우리 결혼합시다!" 그것이 전부였다. 건희와 나는 두 손을 꼬옥 마주 쥐고 다시 걷기를 계속했다. 그때 그 시각부터 우리의 걸음은 믿음과 사랑으로 부풀어진 나직하고 조용한 걸음걸이가 되었다. 모든 걸 건희에게 맡겼다.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결혼

마산 한학자 할아버지의 후예요 나의 정치학과 후배인 한석태는 결혼을 이렇게 풀었다. 실(絲)이 맺어지면 길(吉)하다고. 그러나 여자(女)에게는 혼(昏:저녁)이라고. 그 나름의 조크였다.

시흥을 떠나 서울 한복판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이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 꼭대기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이던가? 서울대 졸업식 날인 2월 21일이었다. 대학 동기들과 대한전선 노동조합 간부들이 먼 길을 와 축하해주었다. 나도 나이 드신 부모님에게 내가 할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주례는 후배요 친구인 장명국 선생의 부친이자 우리나라 고유의 농업기술의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봉사한 서울 농대의 교수였던 분이었다. 키가 작은 농부인 나의 큰 아버지도 그 먼 가평 산골에서 오셔서 우리에게 대추 한 움큼을 던져 주셨다.

아내 된 김건희는 결혼식 몸치장 그대로 나와 함께 강릉 가는 시외버스에 올라 대관령을 넘었고, 조용히 파도 밀려드는 낙산사 해변가 여관방에 몸을 풀었다. 포근한 봄 날씨 같았는데도 저녁부터 정말로 하얀 함박눈이 한치 앞이 보이지 않도록 내려앉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문을 여니 길고 너른 백사장이 함박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설악산 케이블카에 오를 때에도, 권금성 바윗길을 걸을 때에도 함박눈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잤고, 신흥사에도 갔고, 작은 산길을 걸어 바위 계곡에도 올랐다. 따뜻한 햇살로 산길엔 눈이 녹아 있었다. 큰 아이 일수는 이로부터 바로 열 달 후에 태어났다.

이때 아내 된 건희가 설악의 흙길 걸으며 내게 들려준 노래 하나는 너무나도 산뜻하고 아름다워 지금도 그날 그대로 내 마음에 간직되어 있다.

이쁜아 나하고 산길을 갈거나
어쩌면 고렇게 앵두같이 생겼니
산보 갈거나 저기 저 긴 샛길로
부엉새 우는 그곳
나는 그곳이 좋더라

시흥 노동조합 사무실 가까이 붙은 일번대로 건너 언덕 밑, 우물 있는 집 한 칸에 세 들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살림살이는 옷장 하나, 이불 한 채, 옷가지 몇, 작은 화장대, 식기 몇 개가 전부였다. 살림살이가 단출했지만, 아내 된 김 화가는 모든 게 티 한 점 없이 깔끔하고 씩씩하고 아름다웠다.

마당 한 가운데에는 맑은 물 솟아나는 깊은 옛 우물이 두레박과 함께 있었다. 'ㄷ'자 조선집은 앞마당이 컸고 잡초 하나 없이 청결했다. 1년을 살았다. 결혼 직후 임신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몸담고 사는 집을 해마다 바뀌어야 했다. 우리에겐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산 지도 5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집만도 사글세(朔月貰)로 열 번은 옮겨 다녔다. 열한 번째에 가서야 새로 지은 서초동 작은 빌라 2층 한편을 내집으로 마련하였다. 아내인 김 화백은 언제나 씩씩했고, 가난에 굽히지 않았다.

내가 군부독재의 전횡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한전선노동조합에서 쫓겨나기 얼마 전이자 결혼을 한지 채 4년이 안 되는 1980년 2월 하순이었을 터이다. 아내 김 화가가 소속한, 시대의 저항아들이요 청년 민중화가의 모임인 '현실과 발언'의 7번째 준비모임이 1박2일 일정으로 청평 능내 감나무집에서 있었다.

나도 아내 덕으로 어린 아기 일수와 함께 모임 한자리에서 밤새워 막걸리를 마시며, 이들의 소리와 노래에 귀 모을 수 있었다.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시대를 고민하고 표효하는 '멋쟁이' 예술가들이요, 저항아들이요, 화가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마음과 뜻을 그림으로 저항하는 예술가요 화가들이었다.

나는 말없이 밤새도록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모두가 한 핏줄이요, 형제였다. 김건희, 김용태,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백수남,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오윤, 임옥상, 주재환, 성완경, 원동석, 윤범모, 최민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오랜 동안 나를 형제요 한 가족으로 받아 주었다.

▲ 신금호 선생 부인이자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이끌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인 김건희 화백(오른쪽) 작품전. 왼쪽은 민중작가 신학철 화백. ⓒ손호철

<계속>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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