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규인]‘파이팅!’이라고 외칠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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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580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은 영어 'baseball'을 '야구'로 쓰게 된 걸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베이스볼'이라고 쓸 수 있게 된 걸 축하하는 날이다.
한글날 사회면 단골 아이템이 아파트 이름이라면 스포츠면은 '파이팅'이다.
몇 해 전 한 스포츠 매체 논설위원은 "파이팅은 일본에서 유래한 국적 불명 용어"라며 "외국인에게는 주먹을 쥐고 '한번 붙어볼래?'라는 식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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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말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순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합시다’가 목적인 기념일이 따로 없다 보니,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토박이말을 씁시다’ 캠페인이 벌어진다. 올해도 분명 ‘세종대왕께서 요즘 아파트 이름을 보면 울고 가실 것’이라고 탄식하는 기사가 나올 것이다.
한글날 사회면 단골 아이템이 아파트 이름이라면 스포츠면은 ‘파이팅’이다. 파이팅 대신 ‘힘내자’, ‘아자’ 같은 순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거다. 몇 해 전 한 스포츠 매체 논설위원은 “파이팅은 일본에서 유래한 국적 불명 용어”라며 “외국인에게는 주먹을 쥐고 ‘한번 붙어볼래?’라는 식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금메달’도 일본에서 한자 ‘金’과 영어 낱말 ‘medal’을 합쳐 만든 국적 불명 낱말 아닌가. 게다가 파이팅은 이제 엄연히 한국어 낱말이다. 파이팅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등재어라는 게 가장 ‘공식적인 증거’다. 이 사전은 이름 그대로 한국어 표준 낱말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애플(apple)’처럼 간단한 외국어 낱말도 이 사전에 없다.
또 구글에 ‘oppa fighting(오빠 파이팅)’이라고 입력하면 검색 결과가 438만 개도 넘게 나온다. 위키피디아에는 한국어 감탄사 ‘paiting(파이팅)’을 설명하는 페이지도 따로 있다. 이 페이지는 ‘hwaiting(화이팅)’도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파이팅이 격려와 응원이 필요할 때 쓰는 한국어 낱말이라는 걸 전 세계 사람들이 인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어가 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언어가 된 제일 큰 이유는 물론 이 말이 모국어인 나라(들)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전 세계 언어로부터 어휘와 문법을 적극적으로 흡수했기 때문이다. ‘ketchup(케첩)’은 중국어(鮭汁), ‘shampoo(샴푸)’는 힌디어, ‘tatoo(타투)’는 폴리네시아어에서 왔다. ‘chaebol(재벌)’도 영어 낱말이다. ‘오랜만이야’라는 뜻인 ‘Long time no see’도 중국어(好久不見)가 뿌리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한국어’라는 게 원래 따로 있었던 것처럼 자꾸 반대로 가려고 한다.
낱말은 언중(言衆) 선택을 받으면 살아남고 아니면 사라진다. 동아일보에 ‘파이팅’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한 건 1926년 9월 5일이었다. ‘4개 구락부(俱樂部) 야구 연맹전’에서 3위에 그친 중앙 구락부 서상구 감독이 ‘파이팅 부족’을 패인으로 꼽은 것. ‘클럽’을 뜻하는 일본식 조어 ‘구락부’가 우리 언어생활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동안 ‘파이팅’이 계속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한글날을 맞아 ‘한글 파이팅!’이라고 외칠 수 있는 자유를 허(許)하라!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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