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 명예훼손 소송의 나라
이 나라 사람들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정치를 한다. 담론 정치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온전히 말을 통해 정당한 권력을 형성할 만한 능력이 없는 자들이 정치를 하다 보니, 명예훼손 형사처벌 제도를 이용해서 상대방 입을 틀어막는 일을 능사로 안다.
명예롭지 못한 국회의원들은 서로 명예를 지키겠다며 동료를 고발한다. 대통령을 비판했다고 언론을 고발하는 자도 있다. 제 일이 아니어도 고발을 일삼는다. 진실이라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발언이어도 고발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치인은 물론 시민들까지 서로 억울함을 주장하며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데만 능하다. 반대로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차분히 반박할 수 있는 담론 역량은 오히려 후퇴한다. 거슬리면 일단 명예훼손 형사고발부터 해두면 좋다는 식이다. 가짜뉴스니, 패륜적 망발이니, 존엄성을 침해했다느니 등 명예훼손 고발장에 사용하는 수사법은 다양하지만 요점은 한 가지다. 검찰이 반대편을 기소해서 괴롭혀 달라는 뜻이다.
다행히 우리 사법부는 언론보도의 명예훼손 여부를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다. 대통령이나 장관 등 공직자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적 보도는 공공의 이익과 관련한 발언으로 간주해서 보호한다. 특히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발언에 대해 공직자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의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 판결이 옳다고 해서 절차 남용의 문제와 그 과정상의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경찰의 수사력과 검찰의 공소권을 활용한 명예훼손 형사고발의 수법은 더욱 교묘하고 교활해진다. 특히 언론이나 시민의 비판적 발언을 겨냥해서 명예훼손 소송을 남발하는 고발자 중에는 애초에 사법적 판단을 받겠다는 게 목적이 아닌 자들이 있다.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한 상대편이 경찰에 불려 다니고, 검찰에서 공소장을 확인하고, 지지부진한 소송 비용을 염려하게 만드는 게 그들의 진짜 의도다.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명예훼손 소송은 이제 사법제도의 정치적 남용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경험은 아무리 당신이 수사기관에 출석해서 진술조서를 작성하는 데 당당하고, 소송비용을 감당할 만한 여유가 있으며, 심지어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을 가진 정의로운 시민, 노련한 언론인, 아니 특권을 누리는 정치인이라 해도 견디기 어렵다.
하물며 당신이 어느 날 직장에서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은 선량한 일반 시민이거나 독립 언론사의 말단 기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 잔인한 게임을 진행하는 권능은 공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쥐고 있다.
정의로운 시민으로 당신이 지금 바라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탄원과 비판을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입막음하려는 이 게임의 규칙을 개선하는 일이다. 이 나라에 어느덧 사회적 약자가 호소하는 탄원을 듣고서 혐오스럽고 모욕적이라며 진저리를 치는 스스로 존엄한 자들이 늘고 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권력에 부담스러운 발언이라면 각종 인격권 침해 논리를 동원해서 형사고발해야 한다고 믿는 권력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권력남용을 파헤치는 기자를 고용한 언론사를 명예훼손으로 엮은 뒤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파산시켜야 한다고 믿는 정치인들이 돌아오고 있다.
다시 우리가 민주공화정을 이룩하고 유지하면서 함께 경험했던 가장 훌륭한 성취들이 무엇인지 돌아보자. 사람이 아니라 성취를 들어봐야 한다. 그것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비명 같은 목소리로 시작했다.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내지른 타락한 권력을 비판하는 발언들이 모아져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불경스럽고, 모욕적이고, 패륜적인 주장이어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탄압을 일삼았던 바로 그 세력을 권력에서 물리치며 이룩한 것들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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