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 변형윤, 갤브레이스, 폴라니
이제 고인이 된 학현 변형윤 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제도학파 진보 경제학자다. 생전에 전집이 출간돼 누구나 쉽게 선생의 경제학을 접할 수 있다. 나는 인간중심 경제를 추구한 학현경제학이 녹색 지향도 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전집을 읽어보던 차에 선생이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됐다.
갤브레이스가 마셜이나 뮈르달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도덕과학의 면모를 가진 학현경제학이 분배정의와 경제민주화의 길뿐만 아니라 성장 지향 대중 소비사회와 다른 사회생태적 전환의 길을 가리키는 하나의 대목이어서 의미가 적지 않다.
흥미롭게도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는 만년의 칼 폴라니도 관심을 보였던 책이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와 좋은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이 책을 언급하고 있는데 학현과 폴라니의 생각은 유사점과 함께 차이점도 엿보인다.
<풍요한 사회>가 그리는 미국에는 물질적 빈곤, 분배 불평등, 경제위기라는 오랜 질병은 약화된 반면 인플레이션, 의존효과, 사회적 불균형이라는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다. 임금·물가의 상승작용으로 나타나는 인플레이션은 대기업의 시장지배와 그에 대한 대항력에 의해 초래됐다.
또 생산자는 단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뿐더러 광고·선전을 통해 소비자 욕망을 창출한다. 욕망과 소비가 생산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갤브레이스는 이를 ‘의존효과’라 부른다. 성장이 성장을 부르며 자가발전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과잉성장과 거대한 가속의 핵심에 의존효과가 내장돼 있다. 마지막으로 시장공급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는데 대중이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공공재 공급은 심각하게 부족하다. 즉 사회적 균형의 상실이다.
학현은 ‘경제 성장과 국민총생산(GNP)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논하는 글에서 갤브레이스의 핵심 논지를 받아들인다. 그는 갤브레이스의 <거의 모든 이를 위한 경제학 안내>도 번역했다.
학현의 성장주의 비판점은 이렇다. 경제성장은 공해·자연자원 고갈·환경파괴·도시 문제 등을 야기한다. 그리고 공공 사회인프라가 불충분한 데 따른 사적 소비와 사회적 소비 사이의 불균형, 생산자에 의한 소비자욕망의 자의적 창출 및 성장 과정에서 생활패턴의 변화에 의한 욕망의 강제, 인간소외 같은 성장의 폐해가 초래된다. 학현은 말한다.
“경제 성장에 의해 충족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수요의 대부분은 성장 그 자체에 의해서 창출되었거나 성장의 수익자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는 뜻이다. 갤브레이스는 이 사실을 산업은 소비자가 바라는 바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소비자가 그 생산물을 원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만년의 폴라니는 ‘풍요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갤브레이스’라는 유고에서 <풍요한 사회>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이 책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은 경제이론이나 정책 부분보다 문제제기 방식의 도덕적·철학적 함축 때문이라고, 경제를 사회와 연결짓는 규범적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물질적 풍요가 도래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어야 자유로워지는지, 충분감을 가질 수 있는지 하는 문제와 대면하고, 도덕세계가 흔들릴 때 갤브레이스가 토론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의존효과나 사회적 불균형론은 풍요한 성장사회가 ‘인간의 욕망과 필요의 질서를 왜곡’했음을 일깨운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는 갤브레이스가 산업사회에서 완전 고용이라는 규범적 기준에 갇혀 인간 욕망과 필요에 관한 논의를 깊이 진전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좋은 삶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현대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현할지의 논의로 나아간다.
학현은 한국 맥락에 뿌리내린 경제학을 추구했다. 그는 성장의 한계를 내다보고 풍요한 소비사회 비전을 거부했지만 갤브레이스와 달리 빈곤과 불평등 문제, 분배정의와 경제민주화 문제와 격투했다.
그는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질 향상, 육체적·도덕적·정신적 인간 역량 증진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경제학이 부의 연구일뿐더러 인간 연구의 일부라고 본 마셜의 금언은 곧 학현의 푯대이다. 여기서 마셜리언 학현은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집중하며 좋은 삶의 경제학을 추구한 폴라니의 가까운 친구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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