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지난 주말 행복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보는 이로서는 이보다 더 마음 졸일 수 없었다. 치명적인 무릎 부상이 있었고, 경기 시작 1분 만에 내준 실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선수들은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이들의 관련 기사에 격려의 댓글이 봇물을 이룬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그 와중에 생뚱맞아 보이는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여자 배드민턴 단식 결승전에서 안세영이 중국의 천위페이를 꺾었다는 기사 댓글에는 “문재인, 배 아프겠네”가 달렸다. 한국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으니 친중 외교를 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배 아프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승리했다는 기사에는 “윤석열, 어떡하나”가 있었다. 한국 축구가 일본 축구를 이겼으니 친일 외교를 펴온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는 얘기다. 이런 종류의 댓글은 아시안게임 내내 이어졌다. 쓰기에 민망해 인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심각한 혐오 댓글은 더 많았다.
부모끼리 싸우는 가정에서는 자식끼리도 친하기 어렵다. 정부 관계가 나빠지면 국민들의 관계도 나빠진다. 댓글들은 최근 한국 대외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한·미·일 외교를 펴면서 중국과 냉랭해졌다. 그냥 냉랭해진 게 아니라 혐중 정서가 커지고 있다. 한·중관계가 좋지 못하다 보니 중국 여행이 꺼려진다.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가 몰려온다지만 과거 같지 않다는 말도 들린다. 중국 내 한국 교민들도 불편하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혐한이 커지고 있다.
2년 전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일본에는 혐한 서적이 판을 쳤고, 한국은 ‘노(NO)저팬’으로 맞불을 놨다. 일본 여행은 눈치가 보였다. 물론 일본인들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당시에는 일본 내 교민들의 입지가 불안했다. 이웃 국가와의 외교라는 게 항상 같을 수는 없다.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이 나라와 친할 수도 있고, 저 나라와 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나라와 친하다는 게 저 나라와 나빠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와 좀 더 친해질 뿐 저 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최근 한국의 대외관계는 너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는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문제가 있었고, 윤석열 정부 때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 이슈가 있다. 우리로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국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거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친중과 혐일’ ‘친일과 혐중’이 실과 바늘처럼 같이 가고 있다.
최근 지인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대학생 행사에 참석했다. 인도 여성의 인권 개선을 위한 지원을 논하는 자리였다. 한국 대표들은 한·미·일과 인도의 협력이 가져올 영향을 강조하며 수차례 ‘안티 차이나’를 언급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 대표는 미국이 원하는 방식에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만 강조했다고 한다. 중국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는 “최근 국내 상황이 대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니겠느냐”고 한숨 지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이 나라에도, 저 나라에도 팔아야 한다. 게다가 4강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누구와도 협력을 잘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나라라는 얘기다. 널뛰기 외교를 하는 사이 경제는 골병이 들고 있다. 대중국 수출은 급격히 줄었고, 중국에 막대한 투자를 한 기업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일본과는 민관협력이 재개되고 있지만, 투자를 자신 있게 하기 어렵다. 언제 다시 냉기가 흐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 대외관계를 디리스킹할 열쇠는 행정부 최고 권한을 가진 사람이 갖고 있다. 대외관계에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사안들을 보면 대외관계에서 ‘유연한 접근’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응징이 억제”라고 외치는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임명됐고, 야당 대표의 영수회담 제의는 거부했다. 대북관계에서도, 국내 정치에서도 ‘내 편’과 ‘네 편’을 명확히 가르는 입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브라이언 헤어 미국 듀크대 교수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기보다) 협력을 잘하는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개화된 식물은 늦게 발생했지만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과의 협력관계로 번성했다는 것이다. 어디 자연뿐일까. 정글과 같은 대외관계, 국내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병률 경제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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