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맞춤법 용사가 던진 화두 '수용의 자세'
"안되", "역활", '할께요", '뵈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말 자주 틀리는 맞춤법 사례다. 이 네 개가 많고 많은 사례 중 대표적인 예시다. 아마 첫 문장을 보자마자 사이다 없이 고구마 수 십 개를 먹은 것처럼 속이 얹힌 독자들이 꽤 될 것이다.
각종 커뮤니티나 유튜브 댓글만 봐도 맞춤법과 관련해 싸우는 네티즌들이 정말 많다. "어떻게 이렇게 기초적인 걸 틀릴 수 있냐"는 입장과 "말만 통하면 되는 걸 선생처럼 지적하고 있냐"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기자는 "의미만 전달되면 된다"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고는 있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맞춤법을 자주 틀리는 이들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여자친구가 카톡으로 "내일 저녁에 시간 되?"라고 물어보면 콩깍지가 한 꺼풀 벗겨질 것 같다.
예상컨대 '맞춤법 논쟁'은 오늘날의 법칙이 수립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있어 왔을 것이다. 최근 이 같은 상황을 소재로 한 게임이 출시되어 스트리밍 등을 통해 화제가 된 게임이 있다. '맞춤법에 너무 민감해서 주변의 빈축만 사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용사라고?'라는 게임이다.
줄여서 '맞춤법 용사'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훈민정음, 즉 오늘날의 한글을 창제해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우리 글자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한글날'을 맞이해 즐기기 아주 적절한 게임이 아닐까 한다.
■ 몇 달, 몇 년, 몇 시간은 되지만 '몇 일'은 왜 안 되는가
RPG MAKER MV'라는 게임 제작툴로 만든 맞춤법 용사는 엔딩까지 2시간 남짓 걸리는 비교적 라이트한 게임이다. 만화가 '마사토끼'가 제작한 맞춤법 용사는 지난 2019년 작가가 그린 단편 만화 한 편으로부터 시작됐다.
단편 만화의 내용은 이렇다. 작가가 문득 '며칠'이라는 말에 의문을 느꼈다는 것이다. 몇 달, 몇 시간, 몇 년 등 '몇'이라는 단어는 어느 단위에도 붙을 수 있고 언제나 몇으로 표기되는데, 왜 '일'에 붙으면 '몇 일'이 아니라 '며칠'이 되냐는 것이다.
"만약 '몇 일'이 세상에 허용된다면 국민들은 '며칠'파와 '몇 일'파 두 부류로 나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을 것"이라는 다소 허무맹랑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게임이 바로 맞춤법 용사다.
어떤 내용의 게임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며칠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며칠은 '몇'과 '일'이 만난 합성어가 아니다. '몇'에 접미사 '-을'이 붙어 만들어진 파생어다. 그렇기에 끝소리 규칙에 따라 표준 발음도 '며ㄷ'이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맞춤법 용사는 '이도니아'라는 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도니아는 '메치린데 왕국'과 '메디리오 왕국'으로 갈라져 첨예한 대립을 하는 곳이다. 이유는 이미 알 수 있듯이 몇 일과 며칠 때문이다.
두 왕국이 사용하는 언어와 맞춤법이 모두 같지만 딱 하나 몇 일과 며칠만 다르다. 메치린데는 며칠을, 메디리오 왕국은 몇 일을 사용한다. 이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이 정확한 맞춤법이 곧 정의인 규칙에 따라 '맞춤법 배틀'을 통한 '맞춤법 용사'로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 고지식한 주인공이 점차 변해가는 이야기를 담은 게임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맞춤법 배틀은 NPC가 제시한 예문을 읽고 예문 속의 말이 옳은지 그른 지를 고르는 간단한 규칙을 가졌다. 게임을 하다 보면 당연히 올바른 표기로 알고 있던 단어가 사실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경우도 있는 등 꽤 재밌게 할 수 있다.
또한. 스피드웨건과 같이 셜명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대사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가령, '해살'은 '해'와 '살'의 합성어로 사이시옷이 적용되어 '햇살'로 쓰인다 등 당연하게 쓰지만 왜 그런지 몰랐던 단어들의 이유를 알게 된다.
스토리 자체는 가볍지만, 게임이 주는 메시지는 꽤 묵직하다. "언어는 언중의 것"이라는 언어의 사회성, 그리고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변화, 소멸한다는 언어의 역사성을 말한다. 더 나아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논한다.
맞춤법 용사의 주인공은 변태적으로 맞춤법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과도한 맞춤법 지적으로 여자친구와 헤어졌지만, 자신은 잘못 없다고 믿는다. 이런 주인공이 아도니아의 세계를 모험하며 점점 변해간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직접 즐겨보는 편이 나을 터지만,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짜장면'이 올바른 표현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언어란 언제나 변하며 '중요한 것은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주시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주인공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가 여자친구와 화해한다.
■ 중요한 것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자세
하나의 예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야민정음'이 될 수 있다. 최근 '댕댕이(멍멍이)', '머한민국(대한민국)', '커엽다(귀엽다)' 등 야민정음이라 불리며 한바탕 사회적 이슈가 된 바 있다. 이 신조어는 10대, 20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야민정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특히, 40대 이후부터는 한글 파괴라고 여겨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를 '옳다', 혹은 '그르다'로 이분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언어학자들은 세월이 지나 '짜장면'이 올바른 표기로 인정받은 것처럼 야민정음이 공식적인 인정 받을 수는 없지만, 이를 꼭 나쁘게만 볼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정도의 문제는 있다.
야민정음의 적극적인 옹호론자인 박진호 서울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언어가 지닌 사회적 함의에 주목하며 야민정음을 '시대 변화에 따라가는 언어의 변형이 가미된 하나의 놀이문자'로 규정했다.
'훈민정음을 비틀어보다 야민정음'이라는 학술지를 통해 박 교수는 "야민정음은 일부러 다른 문자를 사용하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문자를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희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언어의 일탈이 사회 문화 현상을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든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창조자가 문화적 산물을 어떤 목적과 의도로 만든다고 해도, 그 산물을 향유하는 이들이 독립적으로 해석하고 비트는 데서 새로움이 싹 트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결국 언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새롭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 때마다 이를 받아들이냐, 배척하느냐는 개개인이 결정할 문제지만 배척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의 말처럼 맞춤법 용사 게임도 이 '받아들이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야민정음은 표준어는 아니지만 두루 쓰이는 말이 됐다. 기업의 마케팅 소스로도 활용되고 있다. 팔도비빔면은 '괄도네넴띤'이 됐고, 위메프는 '읶메뜨'가 됐다. 언어는 결국 자주 쓰이다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시다.
■ 때로는 의식적으로 인식을 전환해보라
게임 후반부에는 플레이어에게 재미난 질문을 던진다. 종국에는 메치린데 왕국이 메리디오 왕국을 정복하고 흡수한다. 이후 맞춤법 용사인 주인공과 메치린데인들은 맞춤법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를 논한다.
며칠과 몇 일을 복수 허용하되 교육을 통해 '며칠'을 표준어로 알리자는 온건파와 반드시 '며칠'만을 써야한다는 급진파로 나뉜다. 이 때 주인공은 급진파 편에 선다. 이유는 두 가지다. 곧 죽어도 며칠이 옳다는 그의 신념과 소수가 불편을 감수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에서다.
이 때 포로가 된 메리디오 왕국의 왕이 주인공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옳다고 믿는 맞춤법 신념과 승리한 왕국의 신념이 상충한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게임이기 때문에 꽤 극단적인 상황이 설정됐지만, 주인공이 믿어 의심치 않는 표준어에 대한 신념의 정의는 생각보다 별 것 없다. 표준어의 정의는 "한 나라의 표준으로 정한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지칭한다"이다.
표준어규정 제1장 총칙의 1항에 따르면 '교양 있는 사람들', '현대', '서울말' 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표준어로 등재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는 말은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서울말'로 야민정음을 사용하면 결국 표준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셈이다.
너무 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맞춤법 용사에서 던진 화두는 바로 이로부터 시작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준어로 등재하는 기준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표준어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안 되'나 '할께요' 등 기본적인 맞춤법은 지켜야겠지만,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언제나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맞춤법 용사가 종국에 보였던 모습처럼 말이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인식을 전환하라"라는 말처럼 본인의 신념이나 관념에 상충되는 것이 있다면 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자세도 필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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