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증후군’과 거짓말의 대가들 [김태경의 시선]
거짓말, 인간사에서 가장 일상적인 일
양심에 찔려 고통 당하기도 하지만 체계적 거짓말은 특정 의도·목적 향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위력 발휘하기도
리플리증후군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함으로써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사라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종종 쓰인다. 그러나 거짓말은 영원히 감춰지지 않는다. 결국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이니까. 바야흐로 인간의 본성은 거짓말로 점철돼 있다고 주장해도 무방한 시대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진실을 왜곡하고 속이는 거짓말의 대가다. 거짓말은 인간사에서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거짓말이라면 양심에 찔려 고통을 당하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럼에도 체계적인 거짓말은 특정 의도와 목적을 향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어떤 인간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구세주로 떠받들 때 진실의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특히 집단의 공동 신념은 거짓을 확신으로 둔갑시켜 집단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일조하지만 다른 집단을 배제하는 폐쇄적이고 비이성적 태도를 낳는다. 강한 확신과 신념에 찬 수많은 헛소리들이 번성하는 이유다.
■인간은 거짓말의 대가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 '물오리'에는 "보통사람에게 인생의 거짓말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행복을 빼앗는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 현실을 견딜만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거짓말에 취해 인생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짓말이 인생의 본질인 것처럼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물며 어떤 사회가 거짓말에 능숙해지고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공론화해 사실로 굳어진다면 거짓과 진실의 구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인간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다. 모든 것을 일관되게 목표를 위해 관찰하는 것 말이다. 미국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는 이런사고방식을 "전체 교향곡을 듣기 보다 피날레만 듣는 것"이라는 말로 꼬집었다. 수미일관하게 특정 목적을 위해 내달리는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거짓말을 양산하고 번성하게 할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니까 말이다. 여러변수와 다양성이 공존하는 현실을 '일관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전체주의나 독재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한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점도 주목 할 만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권력의 분배와 작동은 준독재체제나 준전체주의 사회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많은 지성인들은 민주주의를 최악을 피하는 차악쯤으로 여겨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권력과 자본을 최대한 소유한 집단이나 세력이 대중들에게 이게 최선이라고 거짓말을 한 결과가 아닐까. 거짓위에 구축한 제도와 정책으로 이것이 최선이라고.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재직한 첫 한 해 동안 2140가지의 거짓 또는 허위주장을 했다고 워싱턴포스트지는 추산했다. 거의 하루에 평균 5.9가지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트럼프 대통령재임 기간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전세계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과 근본주의의 물결이 일면서 이성적 논의보다는 두려움과 분노에의 호소가 우위를 차지해 민주주의 제도가 약화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오늘날 뉴스와 정치의 오락화부터 지독한 정치적 분열, 기만적인 포퓰리즘까지 광범위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진실의 기반을 침해하고 있다. 고야는 '진리는 죽었다'라는 유명한 판화에서 진리의 여신 베리타스가 치명적인 병에 걸릴수 있는 완벽한 생태계를 묘사하면서 거짓의 우위 시대를 예고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의견을 가질 권리는 있지만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의견이 사실로 둔갑해 객관성의 외피를 입고 사회를 휘젓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거짓과 진실따위는 관심이 없으며 각자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 의견을 사실로 둔갑시켜 공론화하는데만 열을 올릴 뿐이다.
■진실과 거짓사이에서
그러나 거짓말은 생존 투쟁에 없어서는 안될 무기이자 생존의 기술이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거짓말을 할 기회를 일절 주지 않는 사회는 존속할수 없다. 자기 생각을 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만 하는 공동체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인간은 무조적적인 진실을 감당할수 없도록 설계됐다. 자신을 타인과 외부로부터 방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거짓말과 속임수가 필요하다는 것이 인간이 그동안 경험한 진실이자 지혜다. 이미 17세기에 파스칼은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경고하며 거짓말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측했다. 히틀러 시절 독일에서 탈출한 러시아 철학자 쿠아레는 "우리의 시절처럼 거짓말이 횡횡한 때는 결코 없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체계적이고 끊임없이 것짓말을 해댄 적은 정말 없었다"라고 탄식했다. 개인 대 개인간의 거짓말은 본능과 인정투쟁에 따른 것이라 차부해도 사회전체 또는 공동체가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바로잡거나 거짓말의 발흥을 억제하는 역할에 실패한다면 그 사회는 파산할수 밖에 없다.
■진실은 자유가 없다?
현대에 들어와 이념투쟁과 진영대결의 심화는 거짓말과 가짜뉴스를 키우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지키느라 애를 쓰며 남들과 이익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 자꾸 거짓말을 하는 속성을 강화시킨다. 그렇지만 진실과 허위 사이에 회색지대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이를 무시한 거짓말하기는 우리를 곧잘 흑백논리에 빠트려 진실을 가려버린다. 거짓말을 통한 이익 추구는 결국 의지의 문제로 치환된다. 거짓말은 우연적이거나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저짓말을 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거짓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각지각의 직접적인 인상을 버려야 성립하는 것도 그래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세계와 거리를 둘줄 알아야 거짓이 가능하다. 거짓말은 자유의 세계다. 자신이 그려내고 원하는 이미지대로 말할 자유 말이다. 체계적인 거짓말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비합리적 성향에 따른 확증편향을 불러와 거짓을 진실로 오도하는 습성을 뿌리내린다.
반면 진리는 세계에 귀속돼 있어 자유가 없다. 진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진실에 충실하거나 혹은 진실의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줄때 자유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전달은 지식과 앎의 전제조건으로 여기에 자신의 결정에 따른 자유가 개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서다. 즉 진실은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고 생각하면서 세계를 온전히 파악함으로써 찾아내는 개념이다. 이는 우리 지식이나 진실은 세계에 의존적이고 세계로부터 자유로울수 없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언어의 포섭
이런 맥락에서 매체는 거짓말의 소통창구다. 과거 언어에 의존하던 매체는 실시간으로 동영상 등 소통에 필요한 첨단기술을 다루면서 거짓말의 전방위적 유포를 가능케했다. 데이터 조작이 대표적인 사례다. 거짓말하는 능력은 이런 매체 기능을 숙지하고 통제할수 있어야 가능하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현실을 제대로 볼수 없게 만들도록 유도하는 전략적 행동이기도 하다. 조지오웰은 "정치 혼란은 언어의 부패와 관계가 있다"라고 직격했다. 정치 혼란은 말을 의미로부터 분리시켜 정치지도자의 진짜 목적과 공표한 목적 사이에 틈을 벌려놓아서다. 권위주의 정권들은 대개 소통방식 뿐 아니라 사고방식을 통제하기 위해 일상의 언어를 자신들의 목적안에 포섭하는 경향을 띈다. 독재자는 언어를 실재와 다르게 사용해 혼란을 유발시킨다. 헌법에 충성하는게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요구하고 가짜뉴스라는 말을 퍼트려 자신에게 위협이 되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을 겁박하고 소송까자 불사하는 불도저같은 행태를 보인다. 반복되는 거짓은 확신을 낳고 확신은 복잡함을 줄이고 결정을 수월하게 하지만 흑백논리, 양극화, 이분법적 사고와 같은 폐해도 수반한다. 움베르트 에코는 비판적인 여론과 기능을 억누르기 위해 정부가 빈약한 어휘와 초보적인 문법을 사용하면서 이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외치는 행위를 '초기파시즘'의 징후로 내다봤다. 의회나 입법기관 대신 자신을 '국민의 목소리'로 위장한다. 마치 섬광처럼 절대군주가 다시 날개짓을 하며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순간의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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