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 캐디까지… 법원, 직장 내 괴롭힘 대상 폭넓게 인정

법원이 직장 내 괴롭힘의 적용 범위와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이 늘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이를 판단할 기준이 모호한 지점이 있으나 법원이 전보다 적극적으로 괴롭힘 행위를 판단하고 있다며 사각지대를 없앨 근로기준법 개정을 촉구했다.

직장갑질119는 8일 민·형사소송 및 행정소송 판례 87건을 선정해 분석한 ‘2023 직장 내 괴롭힘 판례 분석보고서’를 발행했다고 밝혔다. 현재 근로기준법상 골프장 캐디, 승선근무예비역 같은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등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다. 근로계약을 맺지 않는 노동자나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들도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로 인정하고 법적으로 근로계약 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가해자의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예컨대 한 아파트 안내데스크에서 주민들에게 안내 업무를 담당하던 A씨 등 2명은 입주자 대표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A씨 측이 임금 체불에 항의하고 인상을 요구하자 대표는 이들 요구를 묵살하고 그의 소속 회사에 ‘대기발령’ 또는 ‘전배발령’을 내릴 것을 요구해 결국 이들 직무는 정지됐다. A씨 측이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하자 지난 7월21일 서울중앙법원 민사72단독 류일건 판사는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을 구성하고, 이로 인해 원고들(A씨 측)이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다”며 “피고들은 공동하여 원고들에게 정신적 손해의 배상으로서 위자료를 각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입주자대표가 400만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보고서에는 지난 2월15일 나온 골프장 캐디의 직장 내 괴롭힘 사례도 실렸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1부(부장판사 전기흥)는 반복된 모욕과 질책에 극단적 선택을 한 캐디 B씨의 유족이 건국대 법인과 관리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유족에게 1억7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각종 모욕에 괴로워하던 B씨가 캐디들이 가입된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글을 올리자 B씨를 이곳에서 강제로 탈퇴시키기도 했다. 법원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켰다면 그 피해자가 반드시 근로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시했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조치를 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은 판례도 있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12단독 이관형 판사는 지난 6월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소속 보육교사가 원장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에 따른 공식적 활동 기록이 없다며 기관에 530만원 배상을 선고했다.

직장갑질119는 “직장 내 괴롭힘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명백한 불법행위”라며 “회사는 이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법원은 회사가 보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는 5인 미만 사업장과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모든 노동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직장갑질119 장종수 노무사는 “괴롭힘은 법이 정한 범위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비근로자에게도 발생한다”며 “이제라도 사각지대를 없애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이뤄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