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여행과 숫자

신익수 기자(soo@mk.co.kr) 2023. 10.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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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한다. 난, '숫자'라면 쥐약이다. 문과를 택한 것도,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것도 솔직히 그놈의 '숫자'가 싫어서였다. 오죽하면 어머니 전화번호조차 'ㅇ-ㅈ-ㅇ'을 쳐서 그때그때 콜을 할까. 그런데 이 숫자가 여행업계에서 핵심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항공권 티켓에서다.

늘 명기해야 하는 편명. 'KE905'라는 숫자를 예로 들자. 가장 앞선 알파벳 코드 KE가 대한항공을 뜻한다는 건 누구나 알 터. 그다음부터가 어려워진다. '9'는 유럽 권역, 마지막 '5'처럼 홀수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이라는 의미다. KE905를 굳이 해석하자면 '인천에서 유럽으로 출발하는 대한항공'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심화 과정. '9'처럼 향하는 도시(지역)를 뜻하는 숫자군이 있다. 001~099는 미주, 100~149는 대양주·괌, 700~799는 일본, 460~499와 600~699는 동남아 홍콩 대만 권역이다.

절대 안 쓰는 번호도 있다. 4가 대표적이다. 또 대한항공은 801이라는 숫자를 절대 쓰지 않는다. 1997년 괌 추락사고 편명이 KE801이어서다. 이왕 숫자 얘기가 나온 김에 숫자 넋두리나 해보자.

숫자 젬병인 나에게도 흉터처럼 잊히지 않는 숫자군이 있다. 대표적인 게 주민등록번호와 군번이다. 주민등록번호야 그렇다 치고, 군번 '93-90601××'는 도대체 왜? 훈련병 시절 처음 경험해본 극도의 긴장감 속에 뇌의 가장 말랑말랑한 부분을 뚫고 이 숫자들이 차례로 둥지를 틀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가능하다.

숫자로 대화가 가능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름하여 '삐삐' 시절이다. 공중전화 같은 유선으로 시작번호 '012'인 상대방의 삐삐 번호를 누르면 끝. 그러면 상대방의 삐삐 액정에 발신자의 유선번호가 뜬다. 삐삐를 받은 상대가 그 번호로 다시 리턴콜을 하면 통화 연결이 되는 구조다.

상대가 무반응일 땐 '8282(빨리빨리)', 의리를 나타내는 '7942(친구 사이)'는 기본이다. 시험이나 면접을 앞둔 친구에겐 삼삼칠 박수에서 힌트를 얻은 '337337(격려)' 정도는 날려줘야 했다. 연인들끼리는 '1010235(열렬히 사모)', 거꾸로 보면 독일어로 '사랑'을 뜻하는 '38317(리베)'이 오갔을 정도니 말 다했다.

나의 뇌리에 둥지를 튼 최초의 숫자 조합은 '4444'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 시절 담배 연기 자욱한 만화방에 앉아 고행석 작가의 '불청객' 시리즈를 열독하다 주인공 구영탄이 장난스레 썼던 만화 속 비밀번호를 그대로 써버렸던 거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집안도 '숫자'로 기억된다. 우리 가문의 상징 번호는 '5954'다. 지금 내가 쓰는 휴대전화 끝 번호다. 이 조합은 꽤 생명력이 끈질길 것 같다. 어머니의 바통을 내가 이었는데, 고1 아들 녀석이 휴대전화 끝 번호를 '5954'로 이어버린 탓이다.

이참에 내가 기억하는 가장 긴 숫자군도 고백해야겠다. 계좌번호다. 여행전문기자로 이곳저곳, 글로(지면), 이빨로(방송) 먹고살다 보니 은행명부터 '-'까지 무려 19자리가 되는 기나긴 통장번호(우리은행/701-00**51-**-***)가 저절로 외워졌다. 혹시나 미지급 출연료·원고료가 있다면 그 방송이나 매체 사장님들, '8282' 넣어주시길.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월급 챙겨주는 '1004' 같은 매일경제신문, '1010235'한다는 것도 이참에 전해드린다. '337337'이다.

[신익수 (여행)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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