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 돌잡이하며 흥겨운 부르더호프
[[휴심정] 박성훈의 브루더호프 이야기]
토요일 아침 메이플릿지 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선생님과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네요.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사과를 기계에 넣어 잘게 자른 다음 망에 넣어 프레스로 눌러 사과 주스를 만드는 거였네요. 요즈음엔 사과를 주스기기에 넣으면 몇 초 후면 주스가 나오겠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사과를 잘게 쪼개어 망에 넣고 프레스를 눌러 즙을 받아 마셨는데 이제 갓 수확한 사과를 땀을 뻘뻘 흘리며 올드 패션 방법으로 열심히 사과 주스를 만드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떠오릅니다.
제가 기르는 한국 배나무도 봄날에 아이들이 뿌려준 거름으로 무럭무럭 자라더니 여름엔 로빈새(가슴울새)가 제 배나무에 둥지를 틀어 아주 예쁜 파란색의 알을 낳았습니다. 몇 년 전에 로빈 알을 보고 싶어 어린이집 지붕에 올라가 틈새로 새파란 로빈알을 봤을 때도 감탄했는데 이제는 바로 우리 배나무에 둥지를 틀어 힘들지 않고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있을 수가… 며칠 후엔 엄마 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더니 드디어 이쁜 아기새 두마리가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시작되어 이제 몇 주 후면 즙이 줄줄 흐르고 달고 아삭한 배를 먹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어느 날 밤비가 세차게 몰아치며 돌풍이 왔습니다. 다음날 배밭으로 나가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배 밭에 한 300개 정도의 배가 땅 위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밤새 내린 비와 바람에 배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직 익지도 않은 푸른 배들을 보면서 제 마음도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네요.
쓰라린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남은 배들이 잘 익어 가길 기대하고 있는데 배가 맛있게 익어가자 이번에는 단내를 어느새 재빠르게 알아채고는 내가 따기도 전에 맛있게 익은 것은 벌들이 와서 파먹고는 배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갑니다. 작년엔 청설모가 배가 익어가자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다가 한 입 먹고 버리고, 또 다른 배를 따서 한입 먹고 버리고 이렇게 하더니 배 열 그루 모두 청설모에게 뺏기고 말아 청설모 쫓느라 애를 먹었는데 올해는 벌들이 가만있질 않네요. 일 년 내내 힘들게 농사짓고 수확만을 학수고대하는 농부의 마음이 정말로 이해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배를 수확하는 날입니다. 봄에 우리 배나무에 거름을 주었던 학교 아이들이 다시 배밭으로 와서는 배를 따주고 무거운 상자를 창고에다 날라주었습니다. 배를 함께 먹으며 고마운 마음도 전하면서 배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공동체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한국 배 수확하기만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먼저 옆집에 사는 톰에게 잘익은 배 3개를 주니 너무 좋아하면서 하는 말이 그동안 우리 배밭을 지나가면서 배를 따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왔다고 합니다.
다음날 주일 예배 광고시간에 제가 일어나 한국은 지금 추석인데 메이플릿지는 한국배로 추석을 보내겠으니 이번 주에 생일 맞은 사람들 모두 나오라며 올해 수확한 배중 가장 큰 배를 하나씩 선물하였습니다. 이번 주에 두 살 생일을 맞은 마리아는 큰 배를 받자 엄마가 잘라 주려 하자 싫다며 커다란 배를 입으로 베어 먹었는데 배 크기가 마리아 얼굴만 한 것이 정말 귀엽습니다.
생일을 맞지 않은 사람들도 예배실 밖에 전시된 배를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니 다들 너무 좋아합니다. 지인이 주신 한국 라면도 함께 가져가도록 했는데 영국에서 온 리사 자매님은 자기는 감기가 들면 무조건 한국 라면을 먹는데 먹는 즉시 감기가 낫는다며 한국 라면을 아주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리사가 제일 먼저 라면을 가져가네요. 라면도 금방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일 예배는 며칠 전에 태어난 아기 일라이자를 위한 예배로 드렸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목사님과 할아버지가 아기에게 축복 기도를 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축복 기도가 끝나면 공동체 모든 사람들이 아기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버지는 어린 아기를 안고 공동체 식구들에게 보여주는데 하늘에서 야곱의 계단을 타고 내려온 이 작고 순결한 아기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 함께 천국을 맛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 존 맨스필드는 “어린아이에게 빵을 주면 천국에 종을 울리는 것이지만,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구세주가 이 땅에 다시 오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나 봅니다.
이렇게 이쁘게 자란 아이들이 돌이 되면 우리 메이플릿지 공동체 어린이집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합니다. 한번은 저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안드레아스가 아들 존이 돌이 되었다며 저를 어린이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돌을 맞은 귀여운 아기 존을 보자 처음 우리가 우드크라스트 공동체에 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희 둘째 아들 유빈이는 7개월 때 공동체에 와 그해 여름 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어떻게 아이들의 돌잔치를 하는지 잘 몰랐던 때라 한국에서 하던 대로 평소 가깝게 지내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준 사람들을 초대하다 보니 이래저래 50명이 넘었네요. 아내는 옆에 사는 자매의 도움을 받아 생애 처음으로 케이크도 만들고 풍선도 만들어 장식했습니다. 오신 손님들이 유빈이를 축복해 주는 말씀을 남기도록 메모지도 붙여 놓았습니다. 그때 유빈이를 축복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에 하늘나라에 가신 분들도 계시어 지금은 귀한 축복의 글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한국에 있던 친구들이 유빈이의 한복을 사서 보내주어 유빈이는 멋진 한복을 입고 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형제, 자매들이 유빈이를 축복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한국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한여름에 성탄 노래를 들으며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분들의 사랑과 노력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돌잔치에 빠질 수 없는 행사, 바로 돌잡이입니다. 오신 손님들에게 한국의 돌잡이를 설명하면서 유빈이가 무엇을 잡을지 예상하는 종이를 드렸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적어 냅니다. 드디어 돌잡이 순간입니다. 유빈이 앞에는 실과, 연필, 성경, 삽, 렌치를 놓았습니다. 유빈이는 연필을 잡더니 하나가 성에 안 찼는지 다른 손으로 렌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빈이는 로봇을 만드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유빈이가 무엇을 잡을지 맞춘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 보내온 과자, 사탕, 라면을 선물로 주니 모두 행복해합니다.
유빈이 돌잔치가 지난 후 얼마후 할렘 공동체에 사는 프레드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유빈이 돌잡이에 영감을 받아 자기 딸 돌잔치에도 돌잡이를 했는데 붓을 잡았다며 할머니를 닮아 위대한 아티스트가 될 거라며 좋아합니다.
저희가 12년전 메이플릿지로 이사 온 후 평소 가깝게 지내던 형제들의 아이들이 돌이 되면 유빈이의 한복을 빌려주며 돌잡이를 몇 번 했는데 이제는 메이플릿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돌이 되면 아빠, 엄마를 초대해 돌잡이를 하는 것이 공식 행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안드레아스의 아들 존의 돌잡이에 저희가 초대받은 겁니다. 존은 앞에 놓여진 여러 가지 물건들을 주의 깊게 보더니 존디어 트랙터를 골랐습니다. 아빠인 안드레아스가 공동체 농부로 일하면서 존디어 트랙터를 멋지게 몰며 일하곤 하는데 역시 존도 아빠의 피가 흐르나 봅니다. 이제는 모든 메이플릿지의 아기들이 돌이 되면 돌잡이를 하니 마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만 하네요.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행복하게 지켜보며 형제들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맞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행복한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박성훈 (부르더호프 메이플리치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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