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근로자 아니다" 계약서 쓴 페이닥터도... 원장 지시 받았다면 근로자

위탁계약서 내용 근거로 퇴직금 미지급
대법 "실질 근로형태 중요" 근로자 인정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직의(페이닥터)가 병원과 계약을 할 때 "근로자가 아니다"는 내용에 동의했더라도, 병원 측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종속 관계에 있었다면 '근로자'로 인정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보건업자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 중랑구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A씨는 2017년 8월부터 2019년 7월까지 일한 의사 B씨에게 퇴직금 1,400여만 원을 제때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과거에도 A씨는 2012년 의사에게 임금을 주지 않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공인노무사 도움을 받아 '근로계약서'가 아닌 '위탁진료계약서'를 쓰는 방식으로 의사들을 고용했다.

A씨는 B씨에게도 위탁진료계약서를 쓰게 하며 일을 시켰다. 고정된 월급을 지급하는 이른바 '페이닥터'로서의 계약임에도, A씨는 해당 위탁진료계약서에 "(B씨가) 근로자가 아니므로 노동관계법 관련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포함시켰다.

이 사건에서 퇴직금 미지급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A씨는 재판에서 이를 근거로 "B씨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1심은 위탁계약서 내용과 무관하게 B씨의 근로자성을 인정했지만, 2심은 A씨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1심 판단에 동의했다. 대법원은 우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근로자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에 따라 실질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위탁계약서 기능을 제한했다. 노무를 제공하고 일정액을 지급받는 고용계약과 달리, 도급계약은 프리랜서나 개별 사업자 자격으로 '일을 완성하는 대가'로 보수를 지급받는 것이다. 도급계약의 특징은 회사 측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업무에서 독립성·자주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대법원은 "B씨는 해당 의원의 유일한 의사로 근무시간과 장소가 특정돼 있었고, 매달 진료업무 현황이나 실적을 A씨에게 보고했어야 했다"고 짚었다. 이어 "진료 실적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지 않고 매달 고정적으로 돈을 받았다는 점으로 볼 때 B씨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정원 기자 hanak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