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원형감옥 속 콜센터 상담사의 눈물 [관점+]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거리로 나선 콜센터 상담사
감정노동자 문제만은 아냐
퇴행적 노동문화 심각한 병폐
파견직 근로제에 숨은 모순들
원하청 시스템의 불편한 고리
저비용 고효율에 짓눌린 사람들
화장실 가는 것도 고민하는 상담사
# 초마다 밀려는 콜 탓에 자리를 잠시도 뜨지 못한다. 몇몇은 화장실을 갈 때도 '이석離席 체크'를 해야 한다. 성난 고객을 상대할 땐 감정을 접어둔 채 '욕받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파견직 근로자' 콜센터 노동자(상담사) 앞에 놓인 일그러진 현실이다.
# 사람들이 흔히 고객창구라 부르는 콜센터는 퇴행적 노동문화가 판을 치는 곳이다. 어떤 이는 그곳을 '원형감옥'이라 비판하고, 또 어떤 이는 그곳의 숨 막히는 삶을 '수형생활'에 빗댄다.
# 그런 콜센터 노동자 1500여명이 지난 4~6일 거리에 나왔다. 콜센터 사람들이 집단파업을 단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혹자는 이를 '감정노동자의 한탄'쯤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무겁게 뗀 발걸음엔 콜센터의 구조적 병폐, 원‧하청의 비뚤어진 시스템, 저임금 고효율의 덫, 짓밟힌 인권 등 한국경제의 고질병이 담겨 있다.
# 더스쿠프가 視리즈 '콜센터의 불편한 민낯'을 통해 침묵하던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온 이유를 살펴봤다. 첫번째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 근로자 파견과 삶
콜센터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건 1990년대 초반이다. 고객이 찾는 정보를 쉽게 전달해야 하는 콜센터 노동자(상담사)의 업무는 생각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콜센터 노동자에게도 '불편한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근로자 파견 업종에 콜센터가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근로자 파견…. 대체 이게 뭐기에 콜센터 노동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걸까.
# 어두운 사각지대
정부가 1998년 도입한 '근로자 파견제'의 사례를 살펴보자. 여기 대기업 A사와 청소 노동자 B씨가 있다. A사 소속이던 B씨는 파견제 도입 후 법적 지위가 달라졌다. B씨의 소속이 대기업 A사에서 청소전문업체 C사로 바뀌었던 거다. 청소가 근로자를 파견할 수 있는 업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면서도 커다란 변화의 배경은 무엇일까. 근로자 파견제의 법적 근거인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1998년 7월 1일 시행·이하 파견법)'을 보면 정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근로자 파견 사업의 적정한 운영을 도모하고 파견 근로자의 근로 조건 등에 관한 기준을 확립해 파견 근로자의 고용 안정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고 인력 수급을 원활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법은 선의善意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았다. 파견법을 근거로 대기업은 특정 업종의 노동자를 쉽게 고용하고 자를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했다. 파견법 덕에 등장한 전문사업체는 노동자를 헐값에 파견해 큰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힘없는 노동자는 법적 사각지대로 밀려났다. 법망 바깥의 어두운 곳엔 콜센터 노동자도 있었다.
# 저비용 고효율의 덫
콜센터의 그늘을 좀 더 파헤쳐보자. 콜센터의 외주화가 확산하면서 '콘택트센터'라 불리는 콜센터 전문업체가 줄줄이 탄생했다. 그중 몇몇은 한해 매출액이 3000억원을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콜센터 노동자는 '저임금' '고강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이란 늪에 빠져들었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대기업·공공기관(원청)부터 콜센터 전문업체(하청)까지 이어진 '탐욕의 고리'가 문제였다.
콜센터 노동자가 필요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은 '저비용 고효율'을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사업을 따내야 돈을 만지는 콜센터 전문업체는 90% 이상의 응대율, 90% 이상의 서비스 레벨을 전면에 내세웠다.
응대율은 걸려온 콜 중 처리한 콜의 비중을, 서비스 레벨은 걸려온 콜 중 20초 내에 받은 콜의 비중을 뜻한다. 쉽게 말해, 콜센터 노동자가 걸려온 전화 10통 중 9통 이상을 20초 내에 받는 걸 '계약 조건'으로 내걸었던 거다.
# 베일 속 원형감옥
믿기지 않는 응대율과 서비스 레벨로 사업을 따낸 콜센터 전문업체의 선택은 뻔했다. 이들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원청에 최소 인력을 파견했다. 콜센터 노동자의 임금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놀라운 응대율과 서비스 레벨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감시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콜센터 전문업체 중 상당수는 노동자의 처리콜수·고객응대시간뿐만 아니라 휴식시간까지 모니터링한다. 노동자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울 때 '이석離席 체크'를 해야 하는 곳도 수두룩하다.
10년 넘게 콜센터 현장을 연구해온 김관욱 덕성여대 교수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원형감옥'에 빗댔다. "콜센터 노동자 중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이도 있었어요. '여기선 흡연 아니면 밖으로 떨어지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다'는 식이었죠. 이들에게 콜센터는 원형감옥 같았을지 모릅니다."
김 교수는 콜센터 노동자의 흡연율이 높은 이유에도 뼈아픈 현실이 숨어 있다고 꼬집었다. "콜센터 노동자의 흡연율은 여성 평균의 2배가 넘는 수준이었어요. 이들에게 담배는 1980년대 공장주가 여공에게 제공하던 카페인 각성제와 다를 바 없었죠. 누군가는 '관두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콜센터엔 경력단절여성이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여성들이 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많다보니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건 언감생심이었을 겁니다."
# 달라지지 않은 환경
이런 콜센터 노동자에게 관심이 쏠린 건 공교롭게도 2020년 코로나19 국면에서였다. 그해 3월 서울 구로구 에이스손해보험 콜센터에서 집단감염 사태가 터진 게 일종의 '화두話頭' 역할을 했다. 1m 안팎의 간격으로 책상이 빼곡히 들어찬 공간에서 200여명이 근무한 '11층 콜센터'에선 90명 남짓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콜센터 노동자들이 바이러스에 취약한 닭장 같은 환경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사람들이 주목한 건 콜센터의 일그러진 노동환경이 아니었다. '11층 콜센터가 직장 내 첫 집단감염 사례'란 점에 더 많은 시선을 보냈다.
이 때문인지 엔데믹(풍토병·endemic) 시대가 열린 지금도 콜센터 노동자의 삶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콜센터는 여전히 원·하청 구조에 얽혀있고, 수많은 노동자는 '원형감독'에 갇혀 있다.
# 후진적 노동구조
지난 4~6일 KB국민은행·하나은행·현대해상의 콜센터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했다. 1500여명에 이르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집단파업을 선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아쉽게도 '감정노동자의 한탄'에 쏠려 있다. 2020년 콜센터 집단감염 사태 때 코로나19란 '바이러스'에 매몰됐던 것처럼 콜센터의 구조적 문제와 뼈아픈 모순을 풀어보려는 움직임은 없다.
콜센터의 문제는 피폐한 '감정노동'만이 아니다. 그 밑단에 깔린 후진적 노동구조는 인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병폐다. 콜센터만 그런 것도 아니다. 법적 사각지대에 내몰린 파견직 근로자의 현실은 생각보다 어둡고 차갑다. '원형감옥'이란 커다란 덫 앞에서 우린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과연 답은 있는 걸까.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 참고: 566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10월 10일 발간하는 경제매거진 더스쿠프 視리즈 '원형감옥 콜센터'의 총론입니다. 이어지는 파트 기사들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 [파트1] 화장실 갈 때도 눈치 보는 그들의 비명
출고예정일_ 10월 9일 월요일
· [파트2] 콜센터 그 감옥 같은 공간의 비밀
출고예정일_10월 10일 화요일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