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력 초석' DJ·오부치 선언 25년…한일관계 다음 비전은

김효정 2023. 10. 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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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사죄·미래협력 담은 한일관계 '길잡이'…역사인식 후퇴 속 부침도
악수하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방문중 숙소인 영빈관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효정 김지연 기자 = 21세기 한일관계의 '길잡이'를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8일로 발표 25주년을 맞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하 선언)은 1998년 10월 8일 도쿄에서 열린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일본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채택됐다.

과거를 직시하는 바탕 위에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선언의 골자는 양국이 "20세기의 한일관계를 마무리하고 진정한 상호 이해와 협력에 입각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공통의 목표로서 구축"하기 위한 이정표가 됐다.

일본 사죄 처음으로 한일 공식문서에 담아…'상호존중'도 포함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중요 분기점이 된 이유 중 하나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처음으로 양국의 공식 합의문서에 담겼기 때문이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문구다.

이전에는 일본이 일왕의 한국 대통령 방일 만찬사나 총리 기자회견 등 구두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밝힌 반면 선언은 공식 문서에 명시했다는 점이 다르다.

한일 양국이 전후 걸어온 길을 서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한국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하에서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 온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의 사죄에 호응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선언은 정치, 안보, 경제, 인적·문화교류, 글로벌 이슈 등에 대한 미래지향적 협력 방향을 제시하고, 부속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행동계획'을 통해 구체적 실천 과제 43개 항목을 추렸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한일 공통 인식 기반을 마련했고,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함께 2000년대∼2010년대 초반에 한일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의의를 짚었다.

그러나 이후 과거사 갈등이 오히려 첨예해지고 한일관계 부침이 계속되면서 선언이 지향했던 21세기 미래지향적 협력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고이즈미·아베 내각을 거쳐 지도자들의 역사 인식이 우경화되고 사회 보수화 경향이 짙어지면서 한국 내 반일정서를 자극했다. 한국에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미봉했던 과거사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했다.

지난 6월 열린 김대중·오부치 선언 25주년 심포지엄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10여년간 한일 과거사 대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확정판결에 따른 갈등은 그 정점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3월 한국 주도의 '제3자 변제' 해법을 내놓으며 돌파구 마련을 꾀했다.

이를 통해 양국은 일단 과거사 갈등 국면을 봉합하고 협력 궤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정부 해법을 반대하는 피해자들이 있고 여론도 엇갈리는 등 불안정성이 남아 있다.

강제징용 해법 도출 과정에서 기시다 내각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에도 담긴 사죄·반성을 결국 직접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후퇴한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일 양국 정부와 국민의 공동 자산인데 진정성이 상당히 훼손됐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선언 정신 계승·변화한 국제환경속 새로운 비전 모색 과제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본령을 계승하는 동시에 한일관계 현실과 국제 환경 변화에 맞는 새 비전을 모색하는 것이 현재 양국 앞에 놓인 과제다.

우선 선언에 담긴 과거사 반성과 한일 상호존중의 정신이 더 후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래세대 교육 등을 통해 역사 인식 문제를 중장기적으로 관리해 나갈 필요성도 있다.

신각수 전 대사는 2000년대 1·2차에 걸쳐 개최된 한일 역사공동위원회를 부활할 필요가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역사인식 차이를 줄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잇는 새로운 한일 정상 공동선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정부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는 2025년이 새로운 한일관계 비전 문서를 도출할 유력한 시점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지난 25년간 변화한 국제관계 상황을 바탕으로 한일 양국에 새롭게 필요한 협력 영역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신 전 대사는 "북한 핵무장이 거의 완성 단계고 중국은 굉장히 공세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그런 여건 속에서 한일 관계가 재정립되면서 새로운 비전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김대중·오부치 선언 채택) 당시는 미중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을 때"라며 "지금은 공급망, 해양안보,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개발도상국)에 대한 협력 등 한일 양국이 국제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부분이 너무나 늘어났다"고 했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의 경쟁 상황 속에서 "국제관계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는 과제가 한일 양국에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다만 지금은 파트너십에 대한 양 국민의 진정한 공감대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있다.

양기호 교수는 "한일이 어떤 면에서 수평적 관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의 사죄·반성이나 파트너십에 대한 국민 공감은 후퇴했다"며 "제2의 파트너십을 선언하는 것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오히려 양국 국민들이 정말로 상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kimhyo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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