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망치로 맞아 죽은 여자’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랬어요”
한 여성 역무원이 직장 내 스토킹에 시달리다 살해당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살해 등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7월 인천시 남동구에서 옛 연인에게 스토킹 당하던 여성이 살해당했고, 지난 8월에는 신림동 성폭행·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끊이지 않다 보니, 이를 보도하는 기자들의 고민도 깊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보도해야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어떤 조치가 있어야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글로벌 탐사보도 총회(GIJC)’에 모인 탐사보도 기자들 중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스웨덴 예테보리의 지역신문인 ‘예테보리 포스트’의 안나 약텐(Anna Jakten) 기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웨덴은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아내폭력금지법’이 1864년에 제정될 정도로 세계 최고의 성평등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여성 대상 범죄’는 여전히 큰 숙제라고 합니다. 스웨덴 보건복지부는 10년간 가정·교제 폭력에 대해 분석을 해왔는데도 비극은 계속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정부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대중의 관심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서 매년 가정폭력으로 15명에서 20명의 여성들이 살해되고 있습니다. 결혼했거나 동거한 경험이 있는 스웨덴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그 관계에서 폭력과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정·교제 폭력은 과거의 뉴스가 아닌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는 ‘뉴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나 약텐(Anna Jakten) 스웨덴 '예테보리 포스트' 기자
이에 안나 기자는 동료인 마이클 베르디키오(Michael Verdicchio) 기자 등과 가정·교제 폭력으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6명의 피해 여성 이야기를 다룬 ‘그녀의 이름은’ 시리즈를 1년간 취재해 지난 5월 보도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시리즈는 스웨덴 사회에 큰 반향을 가져왔습니다. 경찰이 페미사이드를 강력조직 범죄만큼 중대하게 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도 컸습니다. '예테보리 포스트'는 원래 남성 독자가 여성 독자보다 많았는데, ‘그녀의 이름은’ 기사는 달랐습니다. 여성 독자가 53%이고 남성 독자는 47%로 집계됐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폭력을 경험하고 있던 백 여명의 여성들이 이메일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취재진에 연락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 “오랫동안 보도됐던 주제이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이런 반향을 불러 왔을까. 안나와 마이클 기자는 글로벌 탐사보도 총회의 ‘혁신적인 방법으로 탐사보도 하기’ 세션에 패널로 참석해 발표했는데, 두 기자를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만났습니다.
우선, 두 기자는 ‘살해 방식’이 아닌 피해자들의 ‘삶’에 집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가정·교제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와 그의 사연이 집중적으로 보도됐습니다. 피해자들은 ‘망치로 머리를 맞아 죽은 여자’, ‘칼에 찔려 죽은 여자’, ‘맞아 죽은 여자’ 같은 ‘살해 방식’으로만 사실상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두 기자는 꿈 많고 웃음 많았던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친구였던 ‘그녀’ 들의 삶이 그 살해로 어떻게 짓밟혔는지를 보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두 기자는 피해자의 가족, 친구 등과 만났고, 오랜 시간을 들여 그들이 기억하는 피해자의 모습, 피해자와의 소소한 추억들을 기사에 담았습니다.
옷에 관심이 많았던 피해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간호사라는 피해자의 꿈, 친구들과 핸드볼을 하고, 수영을 즐겨 했던 사연, 18번째 생일 직후 운전면허증을 따서 첫 번째 차를 구입한 일 등 피해자들의 인생이 기사에 생생히 묘사됐습니다.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 동영상 등을 가미해 피해자의 인생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비극적인 살해로 중단되면서 그녀를 잃은 가족과 친구들의 슬픔과 공허함이 기사 말미에 담겼습니다.
이런 방식의 스토리텔링은 독자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마이클 기자는 “19살이었던 토바는 이미 졸업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까지 고른 상태였는데 졸업파티를 몇 주 앞두고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했어요.”라며 “독자들은 그녀들의 소소하고 행복했던 삶의 장면에 빠져들며 그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이야기와 마주하면서 아픔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습니다.
■ “사회가 조치를 취했다면 그녀들을 살릴 수 있었다.”
감정적인 호소만 한 건 아닙니다. 비극을 멈출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건 스웨덴 사회가 그녀들을 살릴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기사 속 한 여성은 정신병동에서 별다른 감독도 없이 휴가를 나온 전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그는 병동에서 그녀를 살해하겠다고 수차례 이야기했는데도 의료진들은 신고는커녕 그녀에게 경고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여성은 전 남자친구에 의해 밤새 폭행 당해 숨졌는데, 이웃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에게 2년 넘게 학대를 당한 한 여성은 부모님이 경찰에 신고했음에도 긴급 보호 조치를 받지 못하고 두 달 뒤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두 기자는 이렇게 놓친 ‘순간’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 복지 서비스와 경찰, 의료 서비스, 검찰, 대중이 눈 감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안나 기자는 “사회가 어떤 조치를 취했다면, 그녀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 “당신 신문사의 기사를 읽을 시간이 없다”던 독자들을 잡아끌다
내용뿐 아니라 전달하는 방식과 플랫폼도 고심했다고 했습니다.
"3년 전에 10대 여성 세 명이 수 백 명의 남성에게 성매매로 착취당한 내용을 담은 '시스터'라는 기사를 취재중이었어요. 그때 만난 인터뷰이가 '당신 신문사의 기사를 읽을 시간이 없다, 관심도 없다'고 하더군요. 신문은 할머니 세대가 읽는 것이고 본인은 팟캐스트나 다큐멘터리를 즐겨 본다고 했어요.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이클 베르디키오(Michael Verdicchio) '예테보리 포스트' 기자
그때부터 취재를 시작함과 동시에 어떤 매체로 스토리텔링 할지 고민했습니다. 예테보리 포스트는 유서 깊은 지역 신문이지만, 신문 기사 방식에서 탈피해 젊은 세대가 즐겨보는 영상의 문법을 공부하고, 차용했습니다. 몰입감을 주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스토리라인을 짜서 팟캐스트를 제작했고, 영상과 그래픽이 가미된 특별 페이지 등을 제작했습니다. 짧은 예고 동영상을 제작해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등 SNS에도 올렸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시스터' 보도 이후 새롭게 구독한 독자가 1,000명이었는데, 그중 69%가 35세 이하 여성이었습니다. '시스터'가 보도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올해 초에도 가장 인기있는 팟캐스트 시리즈 순위에 올라올 정도로 여전히 스웨덴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역시 팟캐스트에 올린 기사의 평균 청취 시간은 1시간 16분이었습니다. 한 번 듣기 시작하면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를 들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청취자의 86%가 여성이었고, 남성은 14%였습니다. 기사의 독자 또한 25~34세가 가장 많았고, 35~44세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두 기자에게 이처럼 젊은 독자가 반응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그들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답했습니다. 독자가 피해자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고, 독자가 즐겨 사용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한 결과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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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수 기자 (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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