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위기에 천재들 ‘집단 패닉’…안 써본 사람 없다는 ‘이것’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10. 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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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5 - 교육 혁명을 가져온 칠판과 분필

고(故) 이태석 신부가 아프리카 남수단에 봉사활동을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거창해 보이지만 학교를 세우는 일은 너무나 간단했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 칠판 하나 세우니 그곳이 바로 교실이었고 학교였다.

이태석 신부의 활동을 이어받아 남수단 톤즈의 라이촉마을에는 지금 ‘이태석초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라이촉 마을은 톤즈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한센인 정착촌으로 이태석 신부가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마련한 곳이다.

남수단 아이들이 나무 그늘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
초·중·고등학교 교실의 풍경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교실 한 가운데에 커다란 칠판이 자리하고 학생들은 일제히 칠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됐던 19세기 프랑스 알자스 지역의 교실이나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실이나, 멀리 아프리카 이태석초등학교의 교실이나 영국의 상류층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의 교실이나 그 모습은 크게 차이가 없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교실의 보편성을 만든 사물은 바로 칠판이다. 더 정확히는 칠판과 분필이다.

칠판과 분필은 교실 풍경의 보편성만 만든 것이 아니다.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19~20세기의 세계적인 보편성을 형성시킨 주인공 역시 칠판과 분필이었다. 정말 칠판과 분필의 성과를 그렇게까지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시대의 변화가 불러온 칠판과 분필의 등장
180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교장이자 지리 교사였던 제임스 필란스(James Pillans)이 처음으로 칠판을 교실 앞쪽 벽에 걸었다. 학생들에게 커다란 지도 모양을 보여주기 위해 슬레이트 조각들을 이어 붙여 커다란 판을 만든 것이다.

필란스는 슬레이트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기 위해 분필을 사용했다. 분필은 칠판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사용돼 오던 것이었다. 황산칼슘이 포함된 석고를 분쇄한 다음에 실린더로 압축하면 하얀 분필 형태가 되는데 이것을 수업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실에 칠판과 분필을 처음 도입한 제임스 필란스
그는 석고에 착색한 다양한 색깔의 분필을 활용해서 슬레이트판에 지도를 그려서 지리수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학습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학교의 교장이기도 했던 필란스는 칠판과 분필을 활용한 수업법을 다른 교사들에게도 권유해서 이런 교습법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에서는 수학 교사인 조지 바론(George Baron)이 생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위해 처음으로 칠판을 사용했다.

칠판과 분필의 학습 효과가 알려지자 1809년 필라델피아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이를 사용했다. 교사가 칠판에 분필로 글씨를 써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기본적인 수업 방법이 됐다.

이처럼 칠판과 분필이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얘기는 칠판과 분필의 등장을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구, 전화기, 비행기 같은 발명품들이 거의 동시에 시도되고 개발되었던 것처럼.

‘칠판(Black Board)’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15년 무렵이었다. 당시의 칠판은 소나무판을 이어붙여 넓은 판을 만든 뒤 그 위를 검게 칠해서 블랙보드라고 불렸다. 100년 넘게 검은색을 유지해오다가 1930년께 처음으로 녹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눈부심을 줄여 눈의 피로도는 낮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칠판이 녹색으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블랙보드’로 불렸다.

칠판이 필요없던 중세의 교육 방식
그렇다면 칠판과 분필이 발명되기 전 교실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고 수업은 도대체 어떻게 진행됐을까.

중세의 대학의 모습은 학교보다는 성당의 모습에 가까웠다. 신부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듯이 교수가 연단 위에서 학생들에게 강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1088년에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강의실 풍경이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수업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라우렌티우스 데 볼톨리나의 ‘강의하는 헨리쿠스’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은 1350년경 볼로냐대학의 강의실 모습이 담겨있다. 교수는 연단 위 탁자에 앉아서 강독을 하고 학생들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는 모습이다.

당시 수업은 라틴어로 진행됐고 전공 교과는 신학, 법학, 의학에 한정됐다. 그림 속 ‘독일의 헨리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전문가로 윤리학 강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쿠스는 어떤 보조교재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말로써 내용을 전하고 학생들은 이를 들을 뿐이었다.

라우렌티우스 데 볼톨리나, 강의하는 독일의 헨리쿠스, 1350년경, 베를린 판화와 소묘 박물관 소장.
볼로냐대학은 총장들도 학생이 직접 뽑았을 정도로 학생 중심으로 운영이 됐다. 강의를 하는 교수에 대한 엄격한 규정도 두고 있었다. 그 규정은 아래와 같았다.

교수는 단 하루도 허가 없이 결석해서는 안 된다.

도시를 벗어날 때는 다시 돌아온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수강생이 다섯 명 미만이면, 폐강에 준하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종소리가 나면 수업을 시작해서 다음 종이 울리면 1분 내로 수업을 마쳐야 한다.

교재의 내용을 임의대로 건너뛰지 말고, 어려운 내용이라고 뒤로 미루어서도 안 된다.

교수는 매년 정해진 학기마다 정해진 분량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만 한다.

강의 내용이 신학, 철학, 법학 등 요즘으로 말하면 ‘문과 과목’ 중심이었기 때문에 교수가 연단에 앉아서 강론 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대학생들은 대부분 부유한 가문 출신들로 기본적인 소양 교육을 어릴 때 가정 교사를 통해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교수의 강론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근세까지 당시 유럽 사회의 교육의 목표가 교양과 매너, 품성을 기르는 전인교육이었고 교육의 대상은 귀족층에 한정됐기 때문에 이런 식의 교육 방법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효과적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대학과 귀족 학교에서 가르치는 주요 교과목은 독해·작문, 수사학, 역사, 철학, 수학, 음악, 미술, 라틴어 등이었다. 이를 통해 교양을 갖춘 공동체의 리더를 양성하고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창의적인 과학자와 예술가, 철학자 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지식이나 교양을 향상시킬 필요는 없고 오직 세상을 이끄는 소수들을 위한 교육만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은 교육에 대한 이런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몰고온 교육 철학의 변화
사실 이에 앞서 종교개혁을 통해 의무교육의 필요성은 제기됐다. 마르틴 루터는 “누구나 성경을 읽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접해야 한다”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의무 교육을 시작했다.

16세기 이미 뷔르템베르크나 스트라스부르 등 프로테스탄트 영향 아래 있는 도시에서 의무 교육을 시행했고, 17세기가 되면 스코틀랜드나 신대륙의 매사추세츠 등 다른 프로테스탄트 지역까지 의무 교육이 확산했다. 식민지 시대인 1636년 하버드가 신학교로 출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한 지 불과 20년 만에 대학부터 세웠다.

1763년 프로이센은 근대식 의무 교육 제도를 선도적으로 수립했다. 후발 산업국으로서 프로이센이 선택한 추격 전략이었다. 남녀 불문하고 모든 아동이 6~13세 사이에 종교, 읽기, 쓰기, 노래 부르기 등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꿈꾼 평등한 세상이라는 희망은 보통 교육이라는 교육철학을 내놓았다.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젖줄이 됐던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을 통해 ‘대중을 위한 공공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프랑스혁명 세력들은 마을마다 초등학교를 세워 혁명 정신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정신은 나폴레옹을 통해서 전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제도로서의 의무교육과 보통교육은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의 산물이지만 모든 사람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킨 것은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자본가들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 공급처가 필요했다. 당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가 갖춰야 하는 조건은 기본적인 숫자와 과학에 대한 이해도를 갖춰야 하고 통제된 규율을 준수하고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단일화·표준화·대량화라는 산업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학교가 교육을 통해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육의 대상과 목적이 바뀌면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달라졌다. 기본적인 읽고 쓰기 능력에 더해 수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같은 과학 교육이 강화됐고, 윤리와 역사처럼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과목도 가르쳤다.

현대식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한 18세기말, 19세기초의 상황을 보면 이런 상황이 이해된다. 산업화 경쟁에 나선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미국에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교육을 시작했다. 이들 국가들은 의무교육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위해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고 한편에서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이념을 가르쳤다. 의무교육을 통해 민족주의가 강화되고 확산된 것이다.

칠판과 분필이 일으킨 교육혁명
칠판과 분필은 이처럼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가져온 보통교육, 의무교육이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실현하는 도구였다.

과거 소수 엘리트를 대상으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칠 때에는 강론으로만 수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은 한 교실에 모아놓고 이들에게 읽기 쓰기는 물론 수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을 강론만으로 가르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효과적인 학습을 위한 도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지리교사인 제임스 필란스가 칠판과 분필을 교실에 도입한 것이다.

칠판과 분필은 교실 혁명을 일으켰다. 그 효과가 입증되면서 칠판과 분필이 교실의 중심에 자리잡은 것이다.

미국 대학의 강의실 모습
칠판 중심의 교실은 교육적 효율성 그 이상을 제공했다.

일단 칠판은 교사의 강의라는 공연의 중심 무대가 됐다. 교사는 칠판을 무대로 삼아 학생들에게 강의라는 퍼포먼스를 했고 칠판으로 인해서 학생들의 집중도는 높아졌다. 물론, 가끔 졸거나 딴짓을 학생들에게는 분필이 날아가는 일도 일어났다.

칠판을 아예 예술 작품 수준으로 만드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고 조순 전 서울시장이 그런 분 중 한 명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시절 은사였던 조순 교수와의 인연을 기록한 ‘나의 스승, 나의 인생’에 나오는 얘기다. 조순 교수는 칠판 왼쪽 꼭대기에서 오른쪽 하단까지 분필로 써내려가는데 한국어, 영어, 일어에 한시까지 동원하며 빼곡히 채웠다는 것이다. 정 전 총리는 조순 교수의 판서를 ‘가장 지적인 예술 작품’이라고 했다.

교사는 학생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지만, 자신 뒤에 있는 칠판에 수업 내용을 투사했다. 칠판은 작은 아이디어가 더 큰 아이디어로 모일 수 있는 빈 표면이었다. 말하자면 생각의 표면이었다. 칠판은 또한 학생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허브이기도 했다.

칠판은 배우는 방법까지 재정의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에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쉽게 배울 수 있게 했다. 칠판은 그렇게 실수하기 좋은 곳, 실수해도 되는 곳이었다.

칠판과 분필이 만든 세계적 보편성
코로나19로 학교들마저 문을 닫고 재택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면서 이제는 교육의 형태가 바뀔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예측이 무색하게 엔데믹으로 전환되면서 학교와 교실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비록 분필가루 풀풀 날리는 예전의 칠판과 분필 대신에 화이트보드와 매직펜을 사용하는 교실이 늘었지만 ‘분필과 칠판’이 만든 교실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인민학교나 미국 아이비리그의 대학 강의실이나 서울 강남 대치동의 입시학원이나 그 모습은 똑같다. 분필과 칠판이 가져온 교육의 형태보다 더 나은 교육 방법을 아직 사람들이 만들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만큼 분필과 칠판이 인류 역사에 남긴 흔적이 깊고 넓은 것이다.

칠판과 분필 중심의 교실이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인 만큼 보편적인 교실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보편적이다. 국가마다 가르치는 역사나 언어는 다를 수 있지만 수학과 과학에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부 사회 규범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편적인 인권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이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20세기의 보편주의를 만든 원동력이다.

인류의 난제를 해결한 칠판과 분필
얼마전 ‘분필’이 사람들의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한국인 최초로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분필 예찬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허준이 교수는 필즈상 수상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학자는 분필과 칠판을 사랑하는 최후의 사람들이랍니다. 대학에서도 자꾸 칠판을 없애려는데 수학과에서만 꿋꿋이 고집해요. 분필로 칠판에 쓰는 행위는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을 응고시키는 행위예요. 연주자가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무언가 물리적으로 구현해 낸다는 즐거움도 느끼고요. 답이 보이지 않다가도 한 줄 쓰기 시작하면 안 보였던 해법이 보이기도 해요. 또 하나. 판서는 반드시 지워질 숙명을 지녔어요.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현재를 더 충만하게 보내듯, 칠판에 쓰여 있는 필기가 곧 사라질 걸 알기에 그 순간 더 집중하게 됩니다.”

칠판 앞에서 분필을 들고 있는 허준이 교수
유독 수학자들은 분필을 고집한다. 몇 해 전 미국 CNN에서 수학자들의 분필 사랑을 취재했는데 거기 나온 미국 수학회장은 “생각의 예술을 하는 이들의 표현 도구”라는 말로 분필 사랑을 고백했다.

수학자들의 사랑을 받는 덕에 칠판과 분필은 인류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의 영광을 안은 것도 리드 추측 등 모두 11개의 난제를 해결했기 때문인데 허 교수 역시 분필로 이 문제들의 해법을 찾았다.

허 교수가 사랑하는 분필은 ‘하고로모’라는 브랜드의 분필이다. 하고로모(羽衣)는 한자 그대로 날개옷이라는 뜻으로 하고로모가 설립된 1932년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후지분필’을 넘어서는 “최고의 분필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후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오면서 하고로모 분필은 수학자들의 사랑을 받는 명품 분필로 유명해졌다. ‘분필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칭까지 붙을 정도였다. 수학 박사인 구글 엔지니어 제레미 쿤(Jeremy Kun)은 “다른 분필과 다르게 오래 가고 잘 부서지지 않으며 칠판에 쓰면 밝아서 쉽게 읽을 수 있고, 마치 버터처럼 부드럽게 써지며, 가루가 날리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수학자들은 “하고로모 같은 좋은 분필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자신의 은퇴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참가자들에게 하고로모 분필을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창업주의 손자인 와타나베 타카야스 사장의 건강이 나빠져 공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되면서 폐업 위기에 놓였다.

하고로모 분필이 경영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분필 비상사태’라고 까지 표현하는 수학자가 있었고 어떤 수학자는 폐업에 대비해서 15년간 사용할 수 있는 분필을 사서 쌓아두기도 했다.

그 때 이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세종몰 신형덕 대표였다. 그 역시 수학을 사랑하는 수학 강사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분필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신 대표는 “분필이 칠판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창의적인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신 대표 덕에 수학자들이 사랑하는 분필, 수 많은 난제들을 해결했고, 앞으로도 해결할 분필이 아직 생산되고 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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