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홀딱 벗겨 광장에 세워라”…독신자 공개모욕 준 나라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10. 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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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42]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웬 남정네 여럿이 발가벗고 광장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여러 시민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지요. 치기 어린 청년들의 무모한 도전인가 싶었지만, 자의로 서 있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주변 시민들 역시 동정의 눈빛이 역력했지요. 물론 고소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고위 관료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타납니다. 벌거벗은 사내들을 가리키며, 시민들에게 외치지요. “이 자들은 더러운 독신자들이다, 조국을 지킬 군인을 낳지 못하는 놈들이란 뜻이다.”

운동하는 스파르타의 젊은이들. 1860년 에드가 드가의 작품.
그렇습니다. 이 벌거벗은 남자들은 형벌을 받는 중입니다. ‘나 혼자 산다’를 실천하다가 국가로부터 공개 모욕을 당하고 있던 것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비혼주의자들은 매국노와 가까운 취급을 받았습니다.

독신자의 역사는 멸시와 차별의 기록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존중받지만, 과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고 긴 수난의 역사를 사색합니다. 명절 때 당한 비혼족들의 끔찍한 고통을 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만국의 독신자여, 단결하라!)

“독신을 구박하지 말지어다”. 광야에서 메뚜기를 먹으며 독신 생활을 한 세례 요한 묘사도.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의 1517년 작품.
“디스 이즈 스파르타”...독신자 차별의 선두국가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잉태한 자유의 나라로 비치지만, 비혼주의자에겐 끔찍한 독재국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더욱 그러했지요. 기원전 9세기 입법자인 리쿠르고스가 제정한 법의 일부입니다.

“겨울이 되면 행정관들은 독신자들을 벌거벗게 해서 광장을 돌게 하며 모욕을 줘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은 벌을 받아도 싸다’는 노래를 부르게 해야 한다. 어린이도 그들을 욕보여도 된다.”

“누가 결혼을 안 한다고?!!” 영화 300 중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신분 귀천에 상관없이 독신자들은 모멸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5세기 스파르타의 사령관 데르실리다스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가 극장을 찾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상석인 자리에 앉아있던 한 젊은이. 데르실리다스가 자리 양보를 요구하자 젊은이가 대꾸합니다.

“다음에 내게 자리를 양보해줄 자식이 당신에게는 없지 않습니까.” 위대한 사령관이더라도 자식이 없으면 공개적인 핀잔을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신분이 다소 낮은 스파르타인들은 공개적으로 여자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었지요. 독신을 처벌하는 행동(Agamiou Graphe)라는 용어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남자라면, 자고로 전사 아들을 낳아야지.” 스파르타인에게 전사 아들을 낳지 못하는 건 죄악이었다. 영화 300중 한 장면.
아테네 독신자는 공적 목소리 못 내
스파르타만의 극단적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정도가 덜하기는 해도 민주주의의 요람 아테네에서도 독신자를 차별한 건 마찬가지였지요. 플라톤의 저서에는 독신자를 향한 차별이 기록돼 있습니다.

향연에는 “결혼이 법정 의무”라고 써있습니다. 선천적 동성애자들도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법률’이라는 작품에서는 35세까지 결혼 안 한 시민들에게 벌금을 물려야 한다고 얘기합니다.(플라톤 자신조차도 결혼을 안 한 사실을 잊은 것이었을까요) 문학 작품만의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독신자들은 공적인 사안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독신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독일화가 안젤름 포이어바흐가 1869년 묘사한 플라톤의 향연.
그럼에도 자유가 살아 숨 쉬던 아테네에서는 독신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왕왕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철하기 꽃 피우기 시작할 때부터 결혼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현인들도 여럿 나타났지요.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제논 등이 대표적입니다.

자기 오른손과 결혼했다는 디오게네스도 이 중 하나였지요. 고대 그리스의 여성 혐오 문화도 독신 찬양의 불쏘시개가 되었지요. 사회적으로는 독신에 대한 차별이 있었지만, 동시에 철학적인 독신 찬양 움직임도 공존했던 셈입니다.

“이성보다 내 손이 더 좋다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이자 독신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화가 쥘 바스티앙 레파주의 ‘디오게네스’. 1873년 작품.
독신세 물리고...상속 못받게 하고...
고대 로마는 법률로써 독신 차별을 공식화한 나라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독신자들에게 수입의 1%를 세금으로 물렸지요. 독신으로 50세가 넘어가면 재산을 상속하거나 상속받지 못하게도 규정합니다. 독신자가 수익자인 유언은 모두 무효가 되는 극악무도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 몫의 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었지요.

서기 9년에 제정된 ‘파피아 포파에아 법’(Lex Papia Poppaea)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인들은 상속을 받기 위해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고 비아냥대기도 했습니다.

“자 결혼 안 하면 오늘부터 세금.”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상.
고대 로마에서도 ‘결혼 기피’가 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남성들 사이에서는 식민지 여행이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한나절 만에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행 한 번에 수년이 훌쩍 지나는 것도 다반사였지요. 또 군인 신분으로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혼기를 꽉 채우는 일도 많았지요.

독신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제국위기론까지 불거집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도 허용하고, 독신자들을 차별한 배경입니다.

아우구스투스보다 앞선 지도자 줄리어스 카이사르는 ‘당근’으로 결혼을 장려했습니다. 식민지의 땅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면서 기혼자들에게 우선권을 줬던 것이지요. 마치 우리나라가 출산 가정에 분양권을 우선 배정하듯이요.

장 피에르 생 우리의 1785년 작품. 아이를 품고 있는 스파르타인을 묘사.
독신을 찬양한 기독교도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지만, 장가간 자는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한다.“

사도 바울로가 고린도인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입니다. 독신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독신을 하면 우리 주를 온 힘을 다해 모실 수 있지.” 램브란트가 1657년 그린 사도바울.
그리스도교가 전 유럽에 퍼진 뒤, 독신에 관한 생각도 미묘하게 변화합니다. 결혼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독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도 독신자였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지요. 또 가톨릭에서 성직자들은 결혼을 안 하는 독신자여야 했습니다. 실제로 라틴어에서 독신을 뜻하는 Caelibatus에는 독신 caelebs와 천상의 삶 caelum이라는 뜻이 동시에 내포됐습니다.

동시에 결혼은 여전히 사회의 근간이었습니다. 기독교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구가 재생산되고, 이는 경제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혼외정사를 죄로 규정하고 결혼에 충실할 것을 장려한 이유이지요. 사도 바올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정욕이 불타 혼외정사를 하느니, 혼인하는 것이 나으리라.“

아르헨티나 가르멜 수녀원의 수녀들. 가톨릭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살면서 순결을 지킨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신자에게는 결혼생활에 충실할 것을, 성직자에게는 독신의 순결함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투 트랙’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전 성직자의 결혼이 금지된 건 1019년 고슬라르 공의회부터) 기독교는 육체적 쾌락을 죄악시했기에, 결혼 내 성생활 역시 쾌락을 배제하고 오직 출산을 위해서만 관계하라고 신자들에게 조언하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중세 유럽에서는 결혼은 너무나 당연한 의례로 자리 잡습니다. 장가나 시집을 못 간 사람들의 고통은 더할 나위 없었지요. 중세 프랑스에서는 성 카트린 축제가 열리곤 했습니다. 처녀를 상징하는 카트린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결혼을 기원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처녀의 상징인 성인 카트린. 중세 유럽에서 처녀들은 카트린에게 결혼 소원을 빌기도 했다. <저작권자=Cmichael1977>
독신자 100만 시대...결혼에 과세 혜택 준 근세 유럽
“백성의 숫자가 국부를 만들어낸다.”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중세의 어둠이 걷히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던 17세기. 개인의 인권에도 싹이 텄을 법하지만, 독신자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습니다. 인구가 국부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위정자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독신주의자들은 명확히 국부를 갉아먹는 쥐새끼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었지요. 또 당시에는 국제적 성격의 전쟁이 많았던 상황도 인구 필요성이 커진 배경이 됐습니다.

백과전서로 유명한 데니스 디드로는 독신자를 두고 “자기 종의 파멸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일갈했다.
백과전서를 만든 프랑스 학자 데니스 디드로는 ‘독신’의 항목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기 종의 파멸을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에게 선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 디드로에게 있어서 독신자들은 사회를 인구적으로 빈약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존재들이었지요.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에서도 인구 관리는 국가적 과제였습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독신자가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었지요. 도시의 자유와 일자리가 주는 분위기가 독신을 장려한 것이었습니다. 1765년 아베 피숑 사제가 낸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전체 인구 2000만명 중 100만명이 독신자였습니다.

“결혼하는 당신들이 프랑스의 애국자입니다.” 루이 14세 시절 국무장관인 콜베르 초상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르페브르가 1666년 그린 작품.
이미 100년 전인 루이 14세부터 국가 차원의 인구 관리가 이뤄집니다. 국무장관 콜베르가 1666년 발표한 ‘대가족에 관하 칙령’이 대표적입니다. 대가족은 과세에서 제외하고, 스무 살이 넘은 독신자에게 추가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20세 이에 결혼한 사람들은 25세까지 면세 특혜를 주었지요. 이같은 정책도 비혼주의의 흐름은 막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프랑스인’이 필요했던 식민지에서도 비슷한 채찍과 당근이 주어집니다. 캐나다가 배경입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캐나다에 더 많은 프랑스인이 자리를 잡기를 원했습니다. 아들을 20세까지 장가보내지 못하거나, 딸을 16세까지 시집보내지 못하는 가장에게는 벌금을 부여했지요. 반면 제 때 자식들을 출가시키면 20리브르의 하사품을 받았습니다.

“우월한 우리 인종 늘려라”
전 세계가 전쟁으로 물들 때, 독신자를 향한 칼날도 더욱 날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파시스트들이 가장 혐오하던 이들은 ‘독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우월한 민족의 씨앗이 퍼지는 것을 막는 존재들이라고 파시스트들은 생각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 파시즘 리더 베니토 무솔리니가 독신세를 신설한 배경이었습니다. 그는 1927년 25~35세 미혼자에게 1~3파운드의 세금을 추가로 매겼지요.

“더 많은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네.” 1922년 자유주의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무솔리니(가운데)와 그의 가신들.
나치 아돌프 히틀러도 이 독신세의 탁월함(?)에 감명받아 세금 제도를 손질합니다.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극악의 민족주의가 기반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의 더러운 피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강조한 인물이었지요. 그에게 학살된 이들이 유대인·로마니인(집시)·동성애자인 배경입니다.
독일 나치 인종정책국이 발행한 잡지에 묘사된 독일의 가족. 금발 아리아인의 순수성을 강조한 인종주의적 시선이 담긴 작품이다. 독일인이면서 독신인 이들은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독신 전성시대입니다. 삶의 긍정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존중받을만하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포기하거나, 국내 결혼 환경으로 인한 혐오에 빠진 사례가 많아서입니다. “대한민국 망했네요”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들립니다.

채찍도 당근도 비혼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명절 날 결혼 잔소리는 어쩌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지도 모릅니다. 침묵은 때론 더 많은 진전을 이뤄냅니다.

싱글을 찬양하는 ‘밈’.
<네줄요약>

ㅇ독신자들은 오랜 역사동안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

ㅇ스파르타인들은 독신자들을 공개적으로 벗기고 모욕했다.고대 로마에서는 상속을 불허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ㅇ이성의 힘이 강조된 근대에서도 독신 차별은 만연했다.인구가 경제력의 상징인 걸 알아서였다.

ㅇ그래도, 사람들은 결혼 안했다. 명절 때 잔소리도 소용없다.

<참고문헌>

ㅇ장 클로드 블로뉴, 독신의 수난사, 이마고,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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