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의 계절, 몸값정치…민생 능멸하는 대리인 딜레마[한기호의 정치박박]

한기호 2023. 10. 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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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대의정치 양극단 폐해 노정한 巨野
국리민복 외면, 지대추구행위 혈안된 대리인들
명분축적 없이 새 정권 사법수장 지명권 부정
'유사 김명수 체제' 노림수라면 흡사 대선불복
文·明 국정전복 요구뿐…몸값 뛸까 편승한 反尹
지난 10월6일 오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 참석해 환한 표정으로 같은 당 의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앞서 이 대표는 같은 날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위례신도시 사건'과 '성남FC 불법후원금 사건' 재판에서 '건강 문제'로 재판 일정 연기 등을 요구해 검찰 측 모두진술 일부가 지연됐다.<연합뉴스 사진>
지난 10월6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출석의원 295명 중 175명의 반대표로 부결되는 결과가 나왔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건 헌정사상 두번째로, 35년 만이다.<연합뉴스 사진>
지난 9월1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안보·경제노선을 부정하는 내용이 발언의 주를 이뤘다.<연합뉴스 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둘러싼 '체포동의안 가결 정국' 때 개딸 팬덤과 물리력 행사로 아노미(심리적 무정부상태)를 목도한 바 있다. 5000만 국민 주권의 '소재'와 선거를 통한 '행사'를 구분하지 않으면 '무정부상태'가 되고 만다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의 일반론을 가장 앞장서 헐뜯던 그 당 선출직들은 직접민주주의로 제 발등 찍은 격이 됐다. 그들은 '구속영장 기각 이후' 정국에서 곧장 대의제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폐해를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했다.

일명 '주인-대리인 문제'다. '대리인 딜레마'라고도 한다.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낫냐, 오너경영이 낫냐'는 논쟁에서 주로 등장하는 말이다. 전문경영인이 비교적 신(新)개념일 땐 오너 경영인들의 갑질·전횡 사례와 맞물려 각광받았지만, 갈수록 단점 역시 불거졌다. '월급 사장' 같은 주체는 장기적으로도 기업가치를 높일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임기 내 실적 등 단기 이익만 바라볼 유인이 크다는 것이다. 땅 주인이 생산물을 늘리려는 노력이 아니라 사용료만 올려받으려는 행태를 빗댄 데서 출발한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와도 닮았다. 지대추구자는 가진 것으로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갑질의 전제인 '독점'을 유지하는 데 천착하기 마련이다.

이런 주체들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지키려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그 어떤 민폐와 낭비도 불사하게 된다. 그 저의를 더욱 많은 타인에게 들키면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대리인 딜레마'로 돌아와 그 발생 배경을 보면 이렇다. 주인이 대리인을 완벽하게 감시할 순 없고, 양자의 정보력과 눈높이가 다르며('정보비대칭' 문제) 이해관계도 다르다. 특히 정보비대칭은 양화(良貨)로 둔갑한 저질제품만 시장에 내놓게 되는 '역선택', 정당한 비용·리스크를 치르지 않고 은폐하는 '도덕적 해이' 등의 원인이 된다.

주인을 유권자로, 대리인을 국회로 보면 꽤 잘 들어맞는다. 국회 권력은 절대다수 민주당 등 진보야권이 장악하고 있다. 이 대리인은 지난해 3·9 대선으로 민심이 '정권교체'로 판가름 난 민의(民義), 즉 주인의 의사에 날마다 '불복'하고 입맛대로 바꾸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물리적으로 훼방을 놓고 자신들이 편성한 취임식 예산 사용조차 비난한 게 먼 과거가 아니다. 집권 1년을 채우기도 전부터 탄핵·퇴진을 부르짖는 비정상을 일상화했다. '아니면 말고' 식 초유의 장관 탄핵소추안까지 서슴지 않는다.

시간순으로 전부 읊자면 끝이 없다. 가장 가까운 사례만 봐도 1개 정당의 자의로 삼권분립의 한축(사법부)을 비정상상태로 만들었다. 지난 6일 민주당은 '30년 만의 대법원장 공백 사태'를 적어도 두달쯤 늘려잡아도 상관 없다는 선택을 했다. 35년 만에 헌정사상 두번째로 대법원장 인준을 부결시켰다. 원내대표가 천거되지도 않은 제2·제3 인물 부결까지 으름장을 놓은 상황이다. 헌법 제104조의 국회 동의권을 내세우겠지만, 대통령의 지명 권한에서 비롯되는 사법부 수장 임명 프로세스를 어그러뜨렸다.

이런 중대 결정에 명분도 충분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부결 당론을 표결 직전까지 뜸들였다. 부결 직후 논평에서도 '사법부 품격'에 안 맞다며 결격이라 몰아세웠지만 핵심 사유는 명시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공표된 KBS-한국리서치 여론조사(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대로면 대통령 국정(긍정 34.6% 부정 58.7%), 2차 개각 장관 지명(잘함 28.5%·잘못 57.1%) 평가와 달리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통과 32.4% 반대 44.1%·유보 23.5%)은 찬반 전선이 뚜렷하지 않았다.

대법원장 인선에 여론의 관심이 비상했는지부터 의문이다. '새만금 잼버리' 공동책임자로 뭇매를 맞던 야당 의원이 '이재명' 거론됐다고 기세좋게 "지X염X하네" 욕설을 내뱉고, 인신공격이 난무했다지만 자료제출 부실 논란을 넘지 못한 김행 후보자가 퇴장해버린 여성가족부 장관 청문회. 그외 후보자 과격발언이 도마 위에 오른 국방부·문체부 장관 청문회 소음이 정국을 뒤덮은 때였다. 국민이 사법수장 인선을 제대로 지켜볼 틈조차 주지 않고, 그들만의 이익에 따라 부결시켰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게 여당이 주장하는 '이재명 재판' 개입이든 '민변 출신' 차기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노려서이든, 그동안 다수의 횡포대로면 비관적이다. 6년 전 김명수 대법원장 임명 때도 아들·도덕성 시비는 있었고, 진보성향 법관모임 회장을 연달아 지낸 '코드' 우려가 특히 컸다. '보수 적폐' 여론몰이와 다수의석이 이를 뭉갰다. "좋은 통계"라던 통계청장 못잖게, '선택적·지연된 정의' 비판에 "감동주는 재판"을 강변한 대법원장으로 우려는 현실화했다. 유사체제를 고집하려 사법수장 자릴 비웠다면 흡사 대선불복이다.

자신이 뱉은 말에까지 불복하는 지도자들은 또 어땠나. 지난달 온 국민이 단식(斷食) 개념을 헷갈리게 할 행보로 일관하던 이재명 대표는 6월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불체포권리 포기"를 약속한 자기 자신과 싸웠다.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 전날(9월20일) 드러내놓고 부결을 호소했다. 판사가 증거 충분·불충분 양다리를 걸치고 당대표직까지 명분 삼아 구속을 막아준 뒤 이 대표는 "민생 영수회담"을 띄웠다. 하지만 내용은 '나라빚 감축-한미일 공조 강화-원전 확대'를 전부 철회하라는, 국정 부정이었다.

3년 전 "현실 정치에 계속 연관한다는든지 일체 하고 싶지 않다",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불복의 원조' 격이다. 북한 정권이 숱하게 위반한 9·19 합의 '5주년 기념' 행사를 열더니 "안보·경제는 보수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라며 진영싸움 한복판에 섰다. 대통령실은 "(통계조작에) 오염된 정보를 기반"했다며 "안보를 잘 모르는 분들 말씀"이라고 받아쳤다. 문 전 대통령은 10·4 선언 16주년에도 북핵위협 고조에 반성없는 '평화 구호'으로 정부 대북노선 불복 메시지를 거듭했다.

이는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을 6·25 전범(戰犯) 일가의 김여정과 연평도 포격 전범 김영철 영접의 장으로 이용한, 또 혈세 700억원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당한, '삶은 소대가리' 수모까지 당한 정권(대리인)도 임기를 보장해 준 국민(주인)의 퇴장명령에 불복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일 공표된 '데일리안-여론조사공정' 설문대로면 국민 집단지성은 한미일 동맹관계 강화에 과반인 55.1%가 찬성(반대 34.3%)하고 한중 정상회담에도 82.3%가 필요하다(불필요 11.3%)고 골고루 판단했다.

한편 여권에서 윤 대통령과 경쟁·대립했던 정치인들도 '불복 메들리'에 편승하는 양상이다. 지난달 27일 이 대표 구속영장 기각에 유승민 전 의원은 "'윤석열 검찰과 국민의힘'도 생각을 고치라"고 했다. "조국 과잉수사" 발언으로 '조국수홍' 비아냥을 샀던 홍준표 대구시장은 "(재판부가) '불법'과 '부당'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부당을 선택한 거로 보인다"며 소속당의 '개딸에 굴복했다'는 논평을 "저급하다"고 했다. 이 대표 단식에 '밥 투정'이라던 비판을 재빨리 무르더니 사실상 '구속 부당론'에 베팅했다.

이준석 전 당대표는 1일 라디오에서 "이 대표 혐의 중 백현동·성남FC·대장동까지 난 솔직히 지자체장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행정행위 범위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잘 모르겠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이 대표 팬덤에서 SNS 담벼락까지 찾아와 '감사'를 쏟아낸 대목이다. 호사꾼처럼 매번 한동훈 법무장관을 논하는 패턴도 이들이 공히 범(汎)보수 대권 설문 대상에 포함된 탓일수도 있겠다. 민주당 지지, 국정 부정평가 응답자들의 지지를 유승민 전 의원이 거의 독점하다가 3자가 분점하게 된 여론조사 추이가 흥미롭다.

하지만 잠시 꿔줬다가 본선거에서 썰물처럼 빠질 지지로 '몸값'을 영영 불릴 순 없다. 운동권 이념이 건재한 데다 정치 고관여층 지지자를 가진 민주당 인사들은 그걸 알기에 선명성 경쟁할 무대에서 역선택을 노리진 않는다. 보수진영에서도 자당 대통령 탄핵, 대선후보와 존재감 경쟁에 함몰된 당대표를 목도한 뒤 학습효과가 쌓였다. 이제 시민들은 언론·방송사나 시민단체·활동가 주장을 접할 때도 정체성과 의도부터 검증한다. 현직 교사들이 교권보호 집회를 할 때조차도 정치색 짙은 노조와 별도행동을 천명할 정도다. 제3당 교섭단체도 만들어줘봤기에 새로운 선택에 신중하다. 어느 정치인이 조금이라도 더 국리민복을 걱정하는지 지대추구에만 밝은지 가려내기까지 '시차'도 줄고 있다. 주인인 유권자들은 광속으로 스마트해지는데, 대리인 역할보단 '몸값 흥정'에 집착하는 정치인들만 과거에 머무르는 것 같다.

한기호기자 hkh89@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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