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따귀를 맞으며 시작됐다…‘아픈만큼 성숙해진’ 와인 [김기정의 와인클럽]
횡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나서 자란 한우를 횡성에서 도축됐다면 ‘횡성한우’일까요? 몇해 전 횡성한우의 원산지 표기가 법정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농수산물이나, 축산물에서 ‘원산지 표기’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외로 김치 수출이 많아지면서 어디까지가 ‘한국산’ 김치인지를 놓고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배추, 무, 고춧가루를 모두 한국산 재료로 써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고춧가루까지는 중국산을 써도 된다는 주장까지 다양합니다.
농업국가인 프랑스는 다양한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스페인에서 자란 포도를 수입해 프랑스에서 와인을 만든다면 프랑스 와인이 될까요? 프랑스에선 일찍부터 ‘원산지 명칭 통제’(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AOC)를 도입했습니다. AOC란 프랑스에서 와인, 치즈, 올리브유 등 농산품과 식료품 분야의 명칭을 법규에 따라 통제하고 보호하는 제도입니다.
프랑스는 언제, 어떻게 AOC를 만들었을까요? 1300년대 교황이 뺨을 맞은 사건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원산지 명칭 통제에 대해 알아봅니다.
1303년 9월7일 이탈리아 로마 인근 지역 ‘아나니’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군대가 습격해 교황을 겁박합니다. 아나니에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였습니다. 필리프 4세는 성직자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교황이 이에 반대했고 왕이 교황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한 겁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를 거부하자 프랑스군에 있던 시욘나 콜론나가 나서 교황의 뺨을 때립니다. 당시 73세였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를 ‘아나니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교황은 간신히 로마로 피신을 했지만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해 숨을 거둡니다. 다음 교황을 베네딕토 11세가 이어받았지만 1년 만에 선종하고, 프랑스인 클레망 5세가 교황을 이어받습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클레망 5세에게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템플기사단’을 해체하고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길 것을 요구합니다. 이때 탄압을 받은 템플기사단의 스토리는 영화 ‘다빈치코드’ 등 여러 영화와 소설의 단골소재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교황의 와인’이 탄생합니다. 아비뇽이 위치한 프랑스 남부 론 지역은 부르고뉴(버건디), 보르도, 샹파뉴(샴페인 생산지)에 비해 와인 생산지로는 지명도가 낮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이 70년 가까이 머물면서 와인 산업이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아비뇽의 첫 교황인 클레망 5세는 보르도 대주교로 보르도에 포도밭을 보유한 와인 애호가였습니다. 그가 교황에 오르자 보르도 포도밭은 교황 클레망의 포도밭이란 뜻의 ‘샤토 파프 클레망’으로 바뀝니다.
이어 아비뇽의 두 번째 교황에 오른 요한 22세는 아비뇽 인근에 별장을 짓습니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교황의 새로운 성’이란 뜻의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교황이 마시는 와인을 생산하게 되고 이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 이름도 샤토뇌프 뒤 파프란 이름이 붙게 됩니다.
샤토뇌프 뒤 파프의 와인 생산자였던 피에르 르루아 드 부아조미레 남작은 포도 재배자 조합을 만들고 어떤 와인에 샤토뇌프 뒤 파프란 이름을 쓸수 있는지를 정의합니다. 그는 1933년 와인의 품질을 끌어 올리기 위해 지역에 적합한 포도 품종과 단위 면적당 생산량 등을 정하는데 이를 와인 원산지 명칭 통제(AOC)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샤토뇌프 뒤 파프란 이름으로 와인을 팔기 위해서는 샤토네프 뒤 파프 지역에서 재배된 그르나슈 등 특정 포도품종만 사용해야 합니다. 인근 스페인에서 수입한 포도로 만든 와인은 샤토네프 뒤 파프 와인 이름을 못쓰게 한 겁니다.
샤토뇌프 뒤 파프의 뒤를 이어 샴페인을 생산하는 샹파뉴(1935년)가 AOC를 채택하고 보르도, 루아르, 부르고뉴(1936년), 보졸레(1937년) 등 주요 와인 생산지가 AOC를 채택합니다.
샤토뇌프 뒤 파프는 AOC 덕분에 다시 명성을 회복하고 부르고, 보르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주요 와인 생산지로 이름을 올립니다. 한국서도 유명해서 배우 배용준씨가 2015년 결혼식에 샤토뇌프 뒤 파프의 와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신대륙 미국의 나파밸리 와인이 고급화를 추구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키안티 와인은 ‘전통’만 고집하다 품질이 저하된 저가 와인의 대명사가 됩니다. 이때 등장한 게 나중에 슈퍼투스칸으로 불리게 된 ‘사시카이아’입니다.
사시카이아의 설립자는 산지오베제에 청포도 품종을 섞어 만들라는 규정을 무시하고 ‘카베르네 소비뇽’이란 적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듭니다. 이미 프랑스 보르도에서 인기를 끈 포도품종입니다. 대신 원산지 규정에 맞지 않는 포도 품종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장 낮은 등급인 ‘테이블 와인 (Vino da Tavola) 등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시카이아는 와인전문지 ‘디캔터’가 주최한 보르도 블렌딩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1972년 빈티지가 1등을 차지하면서 인기가 치솟고, 결국 독자적인 등급도 획득합니다. 뒤를 이어 ‘산지오베제’포도품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산지 규정을 무시하고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같은 보르도 블렌딩으로 만든 와인들이 속속 등장해 호평을 받습니다. 이들 와인을 토스카나 지역의 특별한 와인이란 의미에서 슈퍼 토스카나(Super Toscana) 또는 슈퍼 투스칸(Super Tuscans)으로 부릅니다.
슈퍼 투스칸이 이탈리아 와인의 명성을 되찾아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탈리아 토착품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전통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1855년 국제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이었던 보르도 와인의 ‘등급’을 정한 것이 지금까지도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농작물을 생산한 농부의 땀방울을 생각해보면 원산지명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고 등급을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산지 명칭 통제가 모든 K푸드 수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K푸드의 대표 수출상품인 라면에 쓰이는 밀가루는 물론이고 고추장의 원료도 대부분 수입산입니다.
중요한 건 AOC를 만든 프랑스 와인 샤토뇌프 뒤 파프와 이를 거부해서 유명해진 이탈리아 와인 슈퍼투스칸 모두 AOC의 틀 안에서 상품화됐다는 점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K푸드도 원산지 명칭 통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앞에선 ‘긴축재정’ 한목소리…뒤에선 식사비 11억 ‘펑펑’ 대통령 직속지구 - 매일경제
- 감히 ‘경차값’에 SUV 팔다니…‘2천만원대’ 하극상, 건방진데 비교불가 [카슐랭] - 매일경제
- 네덜란드 이어 또 나왔다…포르투갈 미인대회 우승女 충격적 실체 - 매일경제
- 젓가락 안왔으니 환불해달라는 손님…그런데 음식 회수는 싫다고? - 매일경제
- 키우던 강아지 백내장걸리자…추석 연휴 택배상자 넣고 버린 男 - 매일경제
- 1인당 2억원씩 자사주 산 두산로보틱스 직원들, 평가차익은 얼마? - 매일경제
- 배송하다 사고 몇번 나면 철창행?…보험사기로 몰렸다 [어쩌다 세상이] - 매일경제
- 인분 소변에 이어 또…이번엔 새 아파트 천장서 이것 나왔다 - 매일경제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생지옥’…530명 사망·3200명 부상 - 매일경제
- 올림픽·WBC 악몽 떨친 국대 천재타자·국대 마무리 AG 金…이제 KS 맞대결 그린다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