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심 느낄 협박만으로도 ‘강제추행’ 처벌 가능 [김진성의 판례 읽기]

2023. 10. 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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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강제추행 성립 요건 완화
“기존 ‘항거 곤란’ 40년 만에 폐기”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법원이 신체에 가해진 물리적 힘(유형력)을 행사한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가 성립된다는 새로운 판례를 내놓았다.

피해자가 저항하기 힘들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 강제추행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본 기존 판례가 40년 만에 깨진 것이다.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새로운 기준이 나오면서 앞으로 강제추행죄 처벌 범위가 한층 넓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처벌 공백 만든 판례 40년 만에 폐기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3년 9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 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 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보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해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A 씨는 2014년 8월 자택에서 당시 만 15세였던 사촌 여동생을 끌어안아 침대에 쓰러뜨리고 본인의 신체 특정 부위를 만지게 하는 등 추행했다. 그는 “만져줄 수 있냐”, “한 번 안아줄 수 있냐”는 말에 자리를 피하려는 사촌 여동생을 따라가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A 씨는 1심에서 성폭력처벌법 위반죄(친족 관계에 의한 강제추행)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위계 등 추행)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A 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의 ‘만져달라’ 등의 말은 피해자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한 A 씨가 사촌 여동생을 침대에 눕히거나 양팔로 끌어안은 행위 등을 할 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사촌 여동생이 항거 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강제추행죄를 구성하기 위한 ‘폭행 또는 협박’의 범위를 더욱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상대방의 신체에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하는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1983년부터 유지됐던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란 기준이 담긴 판례를 폐기하기로 했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초점 맞춰 추행 판단

이번 판결은 강제추행죄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상태’보다 ‘가해자의 행위’에 더 초점을 맞추겠다는 기준을 내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법원은 40년 전 판례에 따라 가해자의 유형력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기준으로 피해자가 강제로 추행당했는지를 판단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기준은 폭행과 협박의 개념을 좁게 해석해 처벌 공백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다.

대법원은 판결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대법원은 “‘강제’의 사전적 의미는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 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라며 “반드시 상대방의 항거가 곤란할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대법원은 이미 수사 기관과 법원이 기존 판례의 법리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고 있는 현실도 반영했다. 혼인 외 성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추행하거나 종업원인 피해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대표자와의 친분을 내세워 이른바 ‘러브샷’을 한 것도 강제추행죄라고 판결한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해석 기준을 명확히 해 사실상 변화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재판 실무와 판례 법리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혼란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면서 “어떤 행위가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하는지는 행위의 목적과 의도, 구체적 행위 내용, 행위의 경위와 당시 정황, 행위자와 상대방과의 관계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앞으로는 강제추행죄 여부를 따지는 재판에선 가해자가 얼마나 강한 폭행을 행사했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협박을 했는지가 중점적으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이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돋보기]

 ‘비동의 추행죄’ 도입 논의도 본격화하나

이번 판결로 ‘비동의 추행죄’ 도입 논의가 본격화할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법원이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해당 법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따져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한 사람을 강간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미국과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도 의사에 반하는 성적 침해 행위를 처벌하고 폭행이나 협박이 있으면 가중 처벌하는 식으로 법원 기조가 바뀌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정의해야 한다고 한국에 권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올해 초 여성가족부가 강간죄 구성 요건 변경을 화두로 던져 주목받기도 했다. 여가부는 지난 1월 제3차 양성 평등 기본 계획에서 강간죄를 ‘폭행·협박 유무’가 아니라 ‘동의 여부’로 판단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법무부의 반대로 발표한 지 9시간 만에 “개정 계획이 없다”고 정정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여가부는 폭행과 협박이 동반되지 않은 성범죄가 많다는 설문 조사 결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여가부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6월 발표한 ‘2022년 성폭력 안전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강간·강간 미수를 당한 여성들의 41.1%가 ‘가해자의 강요’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응답했다.

가해자의 속임이 34.3%로 그다음으로 많았다. 가해자의 협박은 30.1%, 가해자의 폭행은 23.0%였다. 성추행 피해 여성 중에서도 가해자의 속임이 원인이라는 응답 비율(34.9%)이 가장 높았다. 협박(7.1%)과 폭행(2.7%)은 10%에도 못 미쳤다. 이 설문 조사는 2022년 3월부터 12월까지 만 19~64세 성인 1만2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국회에서도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현재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올라와 있다.

법조계에선 대법원 판결 과정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동의 추행·강간죄 도입을 두고 더욱 활발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주심을 맡은 노정희 대법관은 보충 의견을 통해 “성범죄를 규율하는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이나 판례법 등은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다가 피해자의 ‘동의 부재(결여)’를 본질적 기준으로 파악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며 “성적 자유나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피해자의 ‘동의 부재’에 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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