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 29년 만의 정규 시즌 우승…‘그깟 공놀이’에도 야구를 보는 이유[위근우의 리플레이]

기자 2023. 10.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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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했다, 1994…씁쓸함과 홧병 삼키며 기다린 팬의 수많은 날들에
1994년 LG 트윈스 선수들이 이광한 감독을 헹가래 치며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럼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우승을 못 보셨겠네요? 출연 중인 옴부즈맨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가 LG 트윈스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장 먼저 나온 말이다. 그의 나이 이십대 중반, 그리고 LG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은 29년 전인 1994년. 마침 그 소중한 1994년을 경험해 아이에게 팀을 대물림해준 그의 부모들도 이렇게까지 오랜 기다림이 시작될 줄은 몰랐을 게다. 그러니 지난 3일, 정작 본인들의 경기가 없음에도 경쟁자인 NC 다이노스와 KT Wiz의 패배로 LG 트윈스의 정규 시즌 우승이 확정된 순간은 해당 팬들뿐 아니라 야구 팬덤 전체에도 하나의 사건이다. 모든 야구팬에게 자기 팀의 우승 기원이란 비올 때까지 계속되는 인디언 기우제 같은 행위지만, 29년이면 하늘의 모든 물이 마른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법한 시간이다. 기다림이란 단순히 기대감을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감을 억누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29년을 기다린다는 건 29년 동안 배신당했다는 것의 다른 말이므로. 어떤 종류의 믿음은 불신의 갑옷을 입어야 지킬 수 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순위표는 믿을 만한 게 못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명언은 보통 9회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수많은 좌절을 겪어본 야구팬들에겐 시즌이 다 끝나 순위가 확정될 때까진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로 좋은 날이 왔다. 그래서 사건이다. 좋은 날이라서가 아니라,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복음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너무 드라마틱하게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게다. 지난 시즌에도 LG는 강팀이었고 2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키움 히어로즈에게 패배하며 간발의 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과거 왕조 시절 삼성 라이온즈의 안지만-오승환 이후 최고의 불펜 듀오라 할 LG의 정우영-고우석 조합은 올해도 건재했으며 행복한 상상을 펼칠 조건은 상당히 많았다. 어떤 면에선 직전까지 ‘8587667’이란 처참한 순위를 기록하다가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하며 11년 만에 가을야구를 하게 됐던 2013년이 더 드라마틱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위 우승 적기의 퍼즐이 거의 다 맞춰지며 우승 확률이 올라갈수록 ‘올해도 못하면 정말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비례해 커진다. 지난해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눈앞에 어른거리던 우승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류지현 감독이 경질되고, 일종의 우승 청부사로 염경엽 감독이 임명됐지만 시즌 초 무분별한 도루 작전은 오히려 팀의 공격 흐름을 꺾기 일쑤였다. 지략가 이미지가 있지만 우승 문턱마다 좌절해온 감독의 과거도 어딘가 불안했다. 7월부터는 독주했지만 9월에 잠시 6할 승률이 깨지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순탄한 항해지만 매 경기에 이입하는 이들에겐 롤러코스터다. 엄살과 감독 욕은 10개 구단 팬 모두의 공통 덕목이긴 하지만, 그저 1위 팀 팬의 관성적인 엄살이라기엔 LG 팬들은 너무 오래 좌절을 경험해왔다. 낙관과 순전한 기쁨에도 학습이 필요하다.

지난 4일 정규 시즌 우승 기념식에서 LG트윈스 선수들이 모자를 던지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9년의 기다림 또는 29년의 배신
기대감을 억누르는 법 배운 시간
사랑하는 선수가 우승 경험 없이
씁쓸히 은퇴하는 모습 지켜보고
올해는 다를 거라는 믿음 깨지며
속 터지는 날이 더 많았었는데…
지난 우승의 기억을 대물림하며
기다린 끝에 ‘복음’처럼 온 우승
나쁜 날도 견뎠기에 온전한 기쁨

144경기 중 좋은 날은 적고 속 터지는 날은 많다. 야구팬으로 사는 건 공허함 대신 화병을 선택하는 일에 가깝다. 9회 말 대역전극의 환희란 8회까지 쌍욕을 하며 봤다는 얘기다. 그 과정을 봄부터 가을까지 월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반복한다. 어쩔 수 없다. 오후 6시 반에 TV를 켜면 어김없이 우리 팀을 비롯해 다 같이 바보 같은 공놀이를 하고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바보들이 그걸 욕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익숙한 감각이 차가운 캔맥주와 함께 하루에 안정적인 마침표를 찍어준다. 20년이 넘도록 우승 못하는 팀을 지켜보는 것도 그러하다. 대상의 좋은 점만 체리피킹 해서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팬으로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LG 영구 결번인 프랜차이즈 스타 박용택이 2500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걸 감격스럽게 지켜보는 만큼, 가장 꾸준한 타자 중 하나였던 그가 은퇴 시즌까지 결국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씁쓸함도 삼켜야 한다. 우리 팀이 어떤 야구를 하든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자기 팀의 바보 같은 야구에 대해서만 인내하는 게 아니다. 그깟 공놀이에 울고 웃던 자신의 바보 같은 시간까지 껴안고 짊어져야만 오늘을 살 수 있다. 오늘은 다를 거야, 올해는 다를 거야, 믿어주고 속아주며. 물론 그 시간들이 우승으로 보답받아야 한다는 당위도 인과도 없다. 승패에 요행은 없으며 우승하고 싶지 않은 팀은 없다. 단지 내가 그토록 사랑해온 시간만큼 우리 팀이 더 많은 투자와 더 많은 훈련과 더 합리적인 인사를 해주길 바랄 뿐이다. 가끔 좋고 자주 나쁘지만, 좋은 날이 좀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LG 트윈스의 정규 시즌 우승이 기다리면 결국 좋은 날은 온다는 경험이자 학습이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팬덤은 압력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그래왔지만, 언제나 마지막에 지는 건 더 사랑하는 쪽이다. 이번 시즌엔 우승을 하겠노라 천명하며 감독을 교체할 정도로 팀도 팬의 눈치를 보지만, 마음에 안 드는 선발 라인업과 작전, 매니지먼트에 감독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경기장을 찾고 굿즈를 사고 선수들의 서사를 널리 알리는 건 결국 팬의 몫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그렇게 매 순간 기다려주고 어제의 실망과 오늘의 기대를 연결하며 살아온 팬들을 통해 비로소 팀의 발자취는 유산이 될 수 있다고. 1994년의 트윈스와 2023년의 트윈스 사이의 차이란 말하자면 테세우스의 배 같은 것이다. 신바람 야구를 견인하던 LG 삼총사도, 이병규도, 이상훈도 떠나고, 박용택도 떠나고, 잠실 라이벌 두산 베어스의 김현수가 영입되고, 루키 오지환이 주장이 됐다. 모든 구성원이 뒤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이 하나의 역사 안에 묶여 2023년의 우승에 1994년이 호출되는 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응원하며 과거의 좋은 기억을 대물림하는 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서만 우승은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길이 남을 연속적 유산이 될 수 있다. 안 좋은 날도 자기 몫으로 견뎌낸 이들만이 좋은 날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복음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야구는 그깟 공놀이, 어떻게 보든 오락일 뿐이다. 29년을 기다린 LG 트윈스의 정규 시즌 우승은 진보 정치의 승리도, 메시아의 재림도, 역사의 정의구현도 아니다. 은유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복음은 삶의 정치적 차원을 잠시 환기한다. 세상은 노련한 투수처럼 골라내기도 때리기도 어려운 코스의 공을 우리 삶에 꽂아 넣고, 종종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학습한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내일도 오늘 같을 확률이 높다. 냉소를 선택할 백 가지 정당한 이유 앞에서 하지만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망을 경험할 때마다 희망의 근거를 재구성하고, 체념하는 대신 화를 내며, 도래할 미래의 시나리오를 동료들과의 우정 안에서 공유하고 함께 써 내려가는 삶. 다시 말하지만 공놀이를 즐기는 것에서조차 그런 시도들은 자주 배신당한다. 하지만 압박하고 달래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곁을 지키면서 가끔은 놀라운 순간을 만나고 매일 별로였던 것 같던 승패 마진이 조금씩 누적되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줄 알았던 큰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29년은 길지만 그래도 인생이 더 길며, 그깟 공놀이든 뭐든 믿음이 보상받는 경험은 귀하다. LG 트윈스의 정규 시즌 우승을 축하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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