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NOW] '셔틀콕 천재'에서 '여제 대관식'…박세리-김연아 잇는 '스포츠 영웅' 길 들어설까

조영준 기자 2023. 10.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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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뒤 기뻐하는 안세영 ⓒ연합뉴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뒤 기뻐하는 안세영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무릎이 많이 아팠는데 다행히 걸을 정도는 됐어요.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꿋꿋이 하고 싶었죠"

배드민턴 동호인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어린 소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라켓을 잡았다. 고사리손으로 라켓을 이리저리 흔들던 안세영(21, 삼성생명, 세계 랭킹 1위)은 어린 시절부터 '셔틀콕 천재'로 불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적수가 없었던 안세영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그는 만 15세의 나이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안세영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압하며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로 통과했다.

중학생이 국가대표 선발전은 1위로 통과한 적은 없었던 일이었다. 한국 배드민턴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기대주'로 주목을 받은 안세영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도전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1회전에서 천위페이(중국, 세계 랭킹 3위)를 만났다.

▲ 2018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여자단체전 우버컵에 출전한 안세영

당시 중국 배드민턴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천위페이는 1회전에서 안세영을 제압했다. 첫 경기부터 힘든 상대를 만난 안세영은 탈락한 뒤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안세영은 조기탈락했지만 천위페이는 결승에 올랐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안세영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해는 이듬해인 2019년이다. 이해 11월 그는 세계배드민턴연맹(BWF) 광주 코리아마스터즈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에이스'였던 성지현 현 국가대표 여자 단식 코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섭게 성장한 안세영은 2020년 주니어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아쉬움을 만회할 2020 도쿄 올림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1년 연기됐다.

▲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8강전에서 발목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안세영

삼성생명에 입단한 안세영은 2021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 8강에 진출했다. 4강 문턱에서 만난 이는 3년전, 자카르타에서 패배를 안겨준 천위페이였다. 이 경기에서 안세영은 뜻하지 않은 발목 부상이 찾아왔다.

설욕을 노리던 그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천위페이에게 패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감격의 눈물을 쏟는 안세영 ⓒ연합뉴스

'세계의 벽' 실감한 '미완의 천재' 마침내 '여제'로 등극

안세영은 2021년 BWF 월드투어의 '왕중왕전'인 파이널 결승전에서 '인도의 배드민턴 영웅' 푸살라 V 신두를 꺾고 정상에 등극했다. 꾸준하게 국제 대회에 참가하며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보면서 거둔 성과였다.

이듬해인 2022년에는 코리아오픈과 말레이시아 마스터스에서 우승했다. 특히 말레이시아 마스터스에서는 '천적'이었던 천위페이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그는 파이널에서 2연패를 노렸지만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수비와 코트 커버력은 세계 정상급 수준이지만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약하고 후반 체력이 떨어지는 약점이 늘 발목을 잡았다.

▲ 2022년 BWF 월드투어 일본 오픈에서 경기를 펼치는 안세영

2022 시즌을 마친 뒤 안세영은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하며 근력을 키웠다. 약점인 체력을 끌어올리면서 장점인 수비의 위력은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여기에 수많은 국제대회에 나가며 쌓은 경험은 흔들리지 않는 경기 운영 능력으로 완성됐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안세영은 최고 권위 대회인 전영오픈을 비롯해 5개 국제 대회에서 우승했다. 지난 7월 전남 여수에서 열린 코리아오픈에서는 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일본오픈과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중국오픈을 차례로 정복하며 올해만 9개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이뤘다.

▲ 2023 BWF 싱가포르오픈에서 우승한 뒤 환호하는 안세영

눈부신 성적은 차곡차곡 쌓여 세계 랭킹 1위라는 선물로 다가왔다. 5년 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1회전에서 탈락한 뒤 눈물을 흘렸던 소녀는 마침내 세계 배드민턴의 '일인자'로 우뚝 섰다.

그리고 의미가 특별했던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마침내 '대관식'을 치렀다. 이 대회도 도쿄 올림픽처럼 코로나19 여파로 1년이 연기된 올해 치러졌다.

결승 상대는 여러모로 인연이 많은 천위페이였다. 천위페이에게도 이번 대회 우승은 절실했다.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고향인 항저우였기 때문이다.

홈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천위페이는 고향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노렸다. 7일 항저우의 빈장체육관에서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세트 막판 근소하게 앞서가던 안세영은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메디컬 타임을 요청했다.

▲ 안세영(가운데)이 중국의 천위페이를 상대하던 중 의료진에게 무릎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발로 뛰는 배드민턴'을 했던 안세영의 몸놀림은 둔해졌다. 간신히 1세트를 21-18로 잡았지만 2세트부터 안세영의 발은 현격히 느려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천위페이는 역습에 나섰고 2세트를 21-17로 가져왔다.

마지막 3세트에서 걷기조차 힘들어 보였던 안세영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부상으로 점프와 힘이 들어간 공격은 좀처럼 못했지만 장기인 '우주 방어 수비'로 상대 범실을 유도했다. 또한 걸작 만화 '슬램덩크'의 명언 가운데 하나인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을 현실로 증명했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한 뒤 코트에 쓰러진 안세영 ⓒ연합뉴스

강인한 정신력으로 상대 공격을 봉쇄한 안세영은 기습적인 공격으로 천위페이를 압도했다. 공격에서 실마리를 찾지 못한 천위페이는 3세트 막판 근육경련으로 코트에 쓰러졌다.

부상과 근육경련으로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던 안세영과 천위페이는 '혈투'를 펼쳤다. 결국 안세영은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내며 꿈에 그리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안세영 ⓒ연합뉴스

그랜드슬램 노리는 타고난 재능의 노력가…시선은 파리올림픽으로 고정

아시안게임 우승을 확정한 안세영은 "(부상에도) 해 볼 만 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1점씩만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다. (3세트 압도적인 승리는) 통증이 덜 한 것보다 정신만 바짝 차리자는 생각으로 뛰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한국 배드민턴의 '레전드' 방수현이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29년 만에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정상에 올랐다.

5년 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1회전에서 탈락했던 아픔이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밝힌 안세영은 "그때(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시간이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묵묵히 제자리에서 하다 보니 잘 이겨낸 것 같아 행복하다"라고 덧붙였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뒤 성지현 국가대표 여자 단식 코치(왼쪽) 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안세영 ⓒ연합뉴스

우승을 확정한 뒤 안세영은 어린 시절 경쟁자이자 현재 스승인 성지현 코치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았다. 그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까 되더라. 오늘도 아팠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기회가 왔고 잘 마무리해서 눈물이 난 거 같다"고 밝혔다.

어느덧 안세영은 한국 스포츠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여성 스포츠 레전드들의 길을 뒤따르고 있다. '골프 여제' 박세리와 '피겨 여왕' 김연아가 한 시대를 풍미했듯 이제 21세인 안세영은 '스포츠 영웅'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목표는 그랜드슬램이다. 올해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을 정복했고 대망의 올림픽은 내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다.

▲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환호하는 안세영 ⓒ연합뉴스

안세영은 "(올림픽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제가 깊은 서사를 쓰고 있지 않나 싶다.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4~5년이 걸렸는데 그 기간을 제 위치에서 잘 이겨내니까 좋은 결과가 왔다"면서 "올림픽에서 잘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배드민턴을 즐기면서 하면 충분히 좋은 결과로 보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세영은 올해 수많은 국제 대회와 세계선수권대회를 정복하면서 위상이 한층 올라갔다. 아시안게임마저 제패했고 내년 파리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면 본인이 꿈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아시안게임 폐회식을 하루 앞둔 7일 저녁, 안세영은 감동적인 경기를 펼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는 올해 최고 목표였던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다. 이제 그의 시선은 내년 파리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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