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2030’ 위해 갈등국과도 관계 개선… ‘국가 대개조’ 올인 [뉴스 인사이드-탈석유 시대 준비하는 사우디]

유태영 2023. 10. 7. 19: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가재정 65%·GDP 40% 석유 의존
제조업 육성 등 산업 구조 다각화 구상
677조원 규모 ‘네옴시티’ 조성 총력전
관광 허브 위해 지정학적 리스크 해소
2030 월드컵 3개 대륙 공동개최 영향
2034 월드컵 유치 노력에 파란불 켜져
스포츠·엔터 육성 등 소프트 파워 강화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종교적 보수주의, 친미주의적 외교 노선….
 
1930년대 건국해 석유를 개발하고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한 이래로 100년 가까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이해하는 데 필요했던 열쇳말들이다.
 
최근 들어 사우디의 대내외 행보는 이런 전통적 문법으로 해석하기가 다소 난감하다. 올해 3월 시아파 종주국이며 미국의 앙숙이자 러시아의 우방인 이란과, 그것도 중국의 중재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미 언론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뺨을 맞은 격”이라고 평가했다.
 
두 달 뒤 사우디는 또다른 시아파 국가인 시리아와 관계를 정상화했다. 사우디는 지난해에 제다를 찾은 바이든 대통령이 요청한 석유 증산 요청도 묵살했다. 앞서 2018년에는 여성의 운전을 최초로 허용했고, 이듬해에는 남성 보호자 없는 여성의 단독 해외여행 금지 규제도 풀었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2021년 1월 직접 네옴시티 구상을 소개하며 이곳을 자동차와 탄소 배출이 없는 도시로 건설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네옴시티 홈페이지 캡처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38) 왕세자 겸 총리가 2016년 야심차게 발표한 탈석유 시대 국가 개조 청사진인 ‘비전 2030’이 있다는 분석이다.

◆탈석유 시대 대비 비전 2030

“석기시대가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듯 석유가 고갈되지 않아도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사우디 석유장관을 25년간 지낸 아메드 자키 야마니가 1973년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는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가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고민이 담겼다.

훗날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러한 고민의 해법을 담아 비전 2030을 발표했을 당시 사우디는 국가 재정의 65%, 국내총생산(GDP)의 40%가량을 석유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3700만 사우디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35세 미만 젊은이들의 민간 부문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컸다.
비전 2030은 교육·보건·관광·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고 부실한 제조업도 육성해 석유 판매 외에는 성장 동력이 없는 산업 구조를 다각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사우디가 여성을 옭아매던 낡은 관습 타파에 나선 것은 비전 2030 추진 과정에서 여성 노동력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최근 여성에게도 철도 기관사와 우주 비행사 문호를 개방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사우디는 23%에 그치던 여성의 노동 참여율을 30%까지 늘린다는 계획이었는데, 지난해 이미 37%를 기록해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미 하버드대 벨퍼 국제문제연구소가 분석했다.

비석유 부문 정부 수입도 지난해 4분기 6.2% 성장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는 5.8% 성장했다. 모두 무함마드 왕세자가 의도했던 방향이다.

비전 2030의 ‘꽃’은 한국 정부·기업의 수주 총력전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네옴시티’다. 100% 신재생 에너지로 운영되고 주민 900만명이 걸어서 5분이면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충족할 수 있어 자동차가 필요 없는 170㎞ 길이의 최첨단 도시 ‘더 라인’을 중심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팔각형 첨단산업단지 ‘옥사곤’, 산악 휴양단지 ‘트로제나’까지 모두 짓는 데 최소 5000억달러(약 677조원)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더 라인 길이 170㎞, 폭 200m의 900만명 거주 친환경 직선 도시
◆외교 노선에도 변화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5년 국방장관으로 취임 후 예멘 내전에 본격 개입했다. 사우디가 예멘 정부를, 이란이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은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예멘 내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2019년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정유 시설 두 곳이 후티 반군의 무인기 공격을 받은 사건은 사우디에 작지 않은 충격을 줬다. 이는 사우디 내에서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사우디는 외부 위협 제거를 위해 분쟁에서 발을 빼고 안보 파트너를 다각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에서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 무함마드 왕세자를 지구촌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됐다. 양국 관계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앞둔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솟은 유가와 물가를 잡기 위해 체면을 구겨 가며 사우디를 방문, 증산을 설득했으나 빈손으로 귀국해야 했다. 사우디는 이후로도 수차례 감산을 연장했다.
옥사곤 팔각형 수상 첨단산업단지
사우디의 이런 태도가 바로 반미 노선으로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전 2030 추진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려면 고유가 정책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풀이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사우디가 이란과 관계 정상화 직후 미국 보잉사와 370억달러(50조원)어치 항공기 구매 계약을 체결한 점만 봐도 사우디는 오랜 우방인 미국,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 같은 산유국인 러시아 등 사이에서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식의 접근법을 취할 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오늘날 사우디의 외교 우선순위는 국내 정책(비전 2030)의 그림자일 뿐”이라며 “사우디 관료들은 석유가 세계의 지배적인 에너지원 지위를 상실한 이후에도 자국의 부와 역내 패권을 보장할 수 있는 활기차고 다양한 경제를 신속히 창출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다”고 짚었다.

특히 사우디가 외국인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치하고 네옴시티를 중동과 유럽 관광의 허브이자 각종 국제 행사의 무대로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이루려면 지정학적 위기 해소가 필수적이다.

시아파 국가인 이란, 시리아와 관계를 개선한 사우디는 이제 이스라엘과도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 관계 정상화 논의를 구체화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가 중재자인 미국에 내민 조건이 한국·미국, 미국·일본 동맹식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포츠·엔터·관광에도 적극 투자

사우디는 이 밖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 인수, LIV 골프 출범 및 미 프로골프(PGA) 투어와의 통합, 미 종합격투기 대회 ‘프로페셔널 파이터스 리그’(PFL) 지분 인수 등 스포츠계의 굵직굵직한 이슈를 주도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사우디가 2021년 초부터 지난 7월까지 스포츠에 쓴 돈은 최소 63억달러(8조5000억원)에 달한다. 몬테네그로 GDP에 맞먹는 액수다.

이를 두고는 ‘스포츠워싱’, 즉 스포츠를 통한 이미지 세탁 목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스포츠워싱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카슈끄지 살해 사건, 사우디·예멘 국경에서 벌어진 에티오피아 이주민 대량 학살 의혹 등 사우디의 인권 침해 관련 보도가 상세히 나온다”며 “사우디가 분명 스포츠워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각에만 갇히다 보면 사우디가 금융, 첨단기술, 지정학,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요 행위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고자 하는 사우디 지도부의 더 큰 의중을 놓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스포츠는 비전 2030과 관련된 사우디 국가 브랜드 제고 노력의 미끼 상품일 뿐이라는 뜻이다.

사우디의 스포츠 이벤트 산업 가치는 매년 8%씩 성장하고 있으며, 2018년 21억달러(2조8000억원)에서 내년에는 33억달러(4조5000억원)로 성장이 예상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사우디로 골프를 치러 와서 외화를 쓰고 가는 관광객도 늘고 있다고 한다.
트로제나 스키 리조트·인공호수 등 갖춘 산악 휴양단지
BTS의 리야드 공연, 세계 최대 e스포츠 축제 ‘게이머스8’ 개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런 투자는 7000억달러(949조원) 상당의 자산을 관리하는 공공투자기금(PIF), 즉 국부펀드가 주도하고 있다. 국부펀드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비전펀드를 통해 글로벌 기술기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미국 전기차 업체 루시드는 사우디 공장에서 차량 생산을 시작했고, 최근에는 사우디가 테슬라 공장 유치에 뛰어들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투자 수익 창출과 제조업 육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관광산업 육성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슬람 주요 성지 메카,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는 전 세계 17억 무슬림 인구라는 기본적 수요를 갖추고 있지만, 투자를 보다 활성화해 2030년까지 여행·관광산업 규모를 전체 GDP의 1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글로벌 시장조사기업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사우디의 외부 유입 관광객 지출액은 2021년 414억9700만리얄(15조원)에서 지난해 1588억8800만리얄(57조5000억원)로 급증했다.

사우디가 2029 동계아시안게임(네옴시티), 2034 하계아시안게임(리야드)을 유치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해석된다. 2030 엑스포(리야드) 유치전에도 뛰어들어 부산과 경쟁 중이다.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이 2030 월드컵을 아프리카·유럽·남미 3개 대륙 공동 개최로 결정하면서 사우디의 2034 월드컵 유치에도 파란불이 켜졌다는 분석이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