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원조의 퇴장
최근 개최된 인제학원 이사회에서 82년 역사를 지닌 서울백병원 '폐원 안'이 가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때 서울 도심의 종합병원으로 시민의 사랑을 많이 받던 병원이 문을 닫는 이유는 오랫동안 누적된 적자 때문이라 한다. 이 병원은 내가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한 부산백병원의 모체가 됐던 병원이라 폐원에 관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심란하고 자꾸 옛 생각이 난다.
1981년 5월 군 복무를 마친 나는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에 취직했다. 수련의 시절과 군의관으로 근무한 때를 제외하고는 생애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다. 당시 부산백병원은 개원한 지 3년이 채 안 된 지라 한창 성업 중이던 서울백병원에서 파견한 직원이 많았다. 그들 중엔 끝내 복귀하지 않고 부산사람이 된 이도 더러 있었으니 서울병원이 부산병원의 탄생과 성장에 많은 공헌을 한 셈이다.
내가 일한 흉부외과는 근년 들어 심장혈관흉부외과라고 이름이 변경됐지만 예나 지금이나 두 분야로 나뉜다. 일반 흉부질환을 다루는 쪽과 심장과 혈관질환을 다루는 쪽이다. 처음 수년 동안 나는 흉부질환(폐, 식도, 가슴막 등) 환자를 담당하기에도 벅찼다. 하고 싶었던 심장수술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라 '반쪽 전문의'라는 자괴감이 들곤 했다.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가 되겠다던 애초의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다른 길로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방황하던 1883년 초엽의 어느 날. 수술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의료원장이 급히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수술을 마무리하자마자 원장실로 곧장 갔다. 당시 의료원장은 인제학원 설립자인 백낙환 박사였다. 외과 의사였던 그분은 훗날 인제대학교 총장에 이어 인제학원 재단 이사장을 오래 역임하면서 대학과 병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분이 특유의 조용하고 엄중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조 교수, 우리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할 수 있겠소?"
"예?"
뜻밖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심장수술'이란 말에 순간 솔깃했지만 곧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시 수도권과 일부 지방 대학병원에서 개심술(開心術)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우리 병원은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라 완전히 풀이 죽어 대답했다,
"우선 많은 시설과 장비의 보충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집도할 수 있는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아직 능력이 없어서 누구를 초빙하신다면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잠깐 뜸을 들인 후 그분이 전혀 상상도 못 한 제안을 했다.
"조 교수, 이 일을 당신이 해주길 바라오. 내가 외과 의사이니까 잘 알아! 당신이 할 수 있어. 당장은 어렵겠지만, 수년 안에 할 수 있도록 추진해 보시오. 내가 도와주겠소."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그 순간 34세 청년의 가슴에 거대한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항상 뿌옇고 불안하기만 했던 그의 길에 희미하게나마 이정표 하나가 서는듯했다. 심장외과 의사가 되는 길이었다.
이듬해 나는 일본으로 심장외과학 연수를 떠나게 됐다. 멀리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고 싶었지만, 가까운 일본으로 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거라고 말하는 선배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의 일본 의료는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그분의 고언을 받아들인 것이 참 다행이었음을 훗날에야 알았다.
1984년 5월 25일쯤으로 기억한다. 외국 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에 간신히 일본영사관에서 장기비자를 발급받아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탔던 그날. 잔뜩 긴장한 채 가까스로 짐을 챙겨 후쿠오카 공항의 입국 로비로 나와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내 이름 판이라도 들고 있으려니 했는데,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길 10여 분,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 영어로 '닥터 조'가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나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력서에 붙여 보낸 것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소무라 선생은 내가 일한 제2 외과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난 분이었고, 외국인 마중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인구 50만의 쿠루메(久留米) 시는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있었다. 이 작은 도시에 연간 500 례 이상의 심장 수술을 하는 쿠루메 대학병원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운전대를 잡은 이소무라 선생과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곧 일본말로 옮겨갔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영어와 일본어를 마구 섞어가며 의사 표현을 했는데, 실은 둘 다 능숙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내 말뜻을 잘 알아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사람들은 "조 선생의 일본어가 따로 있어!"라며 웃곤 했다.
처음 제2 외과의 수장인 고가(高賀)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갈 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수인사가 끝난 후 교수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개심술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충분히 익혀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조 선생, 염려 마시오. 직원들이 많이 도와줄 거요. 나도 돕겠소!"
일본에서는 교수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정도라는 말이 있는데, 너무나 소탈해 뵈는 분이라 적이 안심했다.
며칠 후 회진 시간에 교수가 날 더러 자기 옆에 서라고 했다. 병상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둘러서고 주치의가 환자 상태를 설명하는데, 처음엔 겨우 알아들을 듯 말 듯 했다. 그러나 차츰 익숙해졌고, 나는 항상 교수님의 바로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사실 교수님이나 상급 의사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2주일의 관찰 기간이 끝나자 바로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배치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재단과 병원의 적극적 뒷받침으로, 필요한 시설과 장비를 정비하고 필요 인원을 보충하여 비교적 튼실한 '심장수술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국한 지 8개월 만에 첫 개심술에 성공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매년 200~250례의 개심술을 실시할 수 있었다. 개심술이 본궤도에 오른 후에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가 심장이식 수술을 공부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여 1997년 11월 심장이식 수술에도 성공했다. 그때 크게 기뻐하시던 이사장님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어른은 내 인생 최고의 멘토였고 후원자였다. 참으로 부족한 나를 끝까지 믿고 성원해주신 은혜를 잊지 못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다음과 같은 좋은 글귀가 있다.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그는 어디에서나 추억의 씨를 뿌리는 중이다.
죽는 날까지 스러지지 않을 추억의 씨를.'
백 이사장님 덕택에 나는 지난 30여년을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임을 했다. 때로는 실패했고 더러는 좌절했지만 그 시절이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씨를 뿌리던 나날이었다. 그 좋은 추억 속에 항상 그분이 웃고 계신다.
어른께서는 생전에 병원의 기능 축소나 폐원에 반대하는 뜻을 고수하셨다.
"원조(元祖) 병원이 어려우면 재단 산하의 형제 병원들이 당연히 도와야지. 서울백병원이 우리 재단의 모체인데, 어떻게 문을 닫겠어!"
서울백병원은 당신의 분신이라고도 하셨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뜻을 존중했다. 그런데 2018년 향년 92세로 어른이 유명을 달리하자 많은 것이 변하고 말았다. 믿었던 후진들은 당신께서 주창하신 창업정신, 즉 인술제세(仁術濟世) 정신을 깡그리 잊어버린 듯하다. 한편 많은 직원과 교수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한다. 기존 병원의 털에서 벗어나, 공공의료 서비스 기관이나 외국인에 특화된 '글로벌 K 메디칼 허브'를 구상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인제학원 설립의 원조 어른이신 백낙환 이사장님, 재단 병원의 원조인 서울백병원. 두 원조의 퇴장으로 혹여 어른이 이곳에 남긴 많은 업적이 빛바래질까 걱정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원조의 퇴장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외친다. "서울백병원 폐원에 반대합니다, 반대합니다!"라고.
조광현 전 부산백병원 원장·서울백병원 정상화추진위원회 공동회장
<조광현 전 부산백병원 원장 프로필> △부산백병원 병원장, 대한 심장혈관흉부외과 학회장 역임 △(현) 인제의대 명예교수, 온천사랑의요양병원 병원장 △격월간 『에세이스트』 등단 (2006), 작가회 회장 역임 △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 부산의사문회 회장 역임 △《에세이스트사》올해의 작품상 3회 수상 △정경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저서: 『제1수술실』 『그는 왜 오지 않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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