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순간, 더없이 작아지는 존재… 저 너머 일렁이는 능선은 '희망' 인가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화폭 속 장소 풍경은 내면 공간의 추상
회화 여정 거치며 원·직선으로 단순화
탈각된 정보 빈자리는 감정의 색채 차지
색의 온도·농도로 화면 전체 정서 조율
아이슬란드·파리 등 장소 옮겨 다니며
다양한 삶 속의 경험들 화면 위에 복기
회화의 방식으로 낯선 타인과 대화 시도
회화는 지금의 날들을 기록한다. 저마다 다른 규모의 관점으로, 각자의 방식으로서다. 자신만의 표현에 가 닿고자 어떤 이는 학문을 탐구하고 다른 이는 기술을 연마한다. 누군가의 화면은 시대의 고민을 투영하고 다른 누구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알고자 분투한다. 끝없이 새롭도록, 또 다르게 표현하도록.
외로움과 고독 끝에 반드시 찾아오는 희망의 색채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그에 공명하는 낯선 타인의 마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린 다정한 화면들. 춤추는 인물의 뒷모습을 묘사한 2021년의 회화는 주인공의 정체를 숨긴 채 몸의 동세 및 청량한 색채 대비를 강조함으로써 장면 속 분위기를 상상하도록 돕는다. 인물을 올려다보는 시점으로부터 애정 어린 애틋함이 배어난다.
작가는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너무 커져 견딜 수 없을 때”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 머물러 보자는 생각에 해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2016년 아이슬란드 북서부의 스카가스톤드에 위치한 네스 아티스트 레지던시(NES Artist Residency)에 입주해 작업하게 됐다. 이후 수년간 파리와 베를린, 도쿄, 뉴욕 등 해외 도시를 옮겨 다니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계획에 따른 여정은 아니었다. 각각의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를 다양한 장소로 끊임없이 이끌었다.
“장소를 찾지 못할 때, 장소를 잃어버렸을 때, 그리고 장소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존재가 가장 큰 방황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 그의 몸과 마음이 가장 연약할 때 한없이 강한 부드러움으로 보호받았던 최초의 기억으로, 어쩌면 사람은 그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도 본능처럼 그가 담길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매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유진의 최근 작가노트에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물리적 신체와 공간을 연동시키며, 개인의 정체성 발현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서 장소 및 관계의 의미를 탐구하는 면모다. 장소는 개인으로 하여금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맥락에 속할 수 있도록 연결 짓는 매개체다. 동시에 그의 말처럼 존재의 불안을 잠재우는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푸른 밤하늘 아래 작은 인물 형상 하나를 배치한 회화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연작의 형태로 제작한 화면 중 하나다. 고독의 순간, 더없이 작게 묘사된 존재의 부피가 광활한 남청색의 우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작은 인물은 늘 화면 하단부 중앙에 자리 잡은 모습이다. 지표처럼 심어 둔 자아의 형상이 특유의 자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처음 서울을 떠나 머무를 도시를 결정할 당시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이기를 바랐다. 새로운 도시로 건너갈 때마다 바다와 호수가 있는 장소에 방문했다. 낯선 장소에 도달하면 꾸준히 그곳의 일출과 일몰을 보았다. 화면에 줄곧 드러나는 색채의 출처는 그와 같은 기억들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것을 보게 될 이에 대해 끝없이 생각한다. 글이나 말 대신 회화의 방식으로 낯선 타인과 더 가까이 대화하고 싶다는 천진한 마음이 작업의 동기다. 바라보는 이가 누구든 그림에 담은 감정을 눈여겨보아 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누군가가 알아듣기를 원한다는 마음 때문에” 때로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진부한 묘사가 반복되지 않게끔 언제나 스스로 경계한다. 돌가루 및 건식 재료를 표면 질감 표현에 접목함으로써 화면이 전하는 직관적 인상을 보다 다채롭게 변주하기도 한다.
주유진의 회화에서 색채는 실재를 재현하기보다 화면 전체의 정서를 조율하는 매체로서 기능한다. 색이 지닌 온도와 채색된 농도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감각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의 시선이 잠시 한데 머물 수 있도록, 캔버스 위 평면을 하나의 특별한 장소로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그곳에 담아 둔 마음의 울림이 상대에게 가닿기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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