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이 양을 치던 들판, 목동[땅의 이름은]
1960년대 도심정비로 발생한 이주민이 목동 정착하며 성장
열악한 인프라와 상습 침수 재해로 고통겪었지만
신시가지 조성 이후 발전해 강남 이은 학원가까지 형성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살던 판잣집이 허물려 쫓겨난 이들은 다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1960년대 도심 재정비 사업으로 뒤집어진 서울은 이런 풍경이 흔했다. 지금의 용산구와 동작구, 서대문구 일대에 대규모로 형성돼 있던 무허가 판잣집이 대거 철거된 시점이 이 무렵이다. 거기 살던 이들은 새로 정착할 데를 찾아 헤맸다. 상당수는 양천구(당시 영등포구)로 갔다. 거기에 다시 무허가 판잣집과 움막이 서기 시작했다. 주로 안양천변을 타고 촌락이 형성됐다. 현재 양천구 목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시민 반응은 미지근했다. 신시가지 아파트는 1단지(1985년)를 시작으로 14단지(1988년)까지 차례로 준공됐으나 빈집이 넘쳤다. 미분양이 난 것이다.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 게 컸다. 영등포 서쪽 깊숙이 자리 잡은 목동에서 시내까지 이동하기란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5호선이 여의도와 광화문을 잇던 시절도 아니었다.
안양천도 문제였다. 비 내리는 안양천은 툭하면 넘쳐서 주거지를 덮쳤다. 이러면 양천구에서 영등포구로 넘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목동에 살면서 안양천 건너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공원들은 비가 내리면 지각하거나 결근하는 날이 잦았다.
1990년대 들어 목동을 둘러싼 주거 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치수 사업으로 침수피해가 잦아든 게 우선이었다. 버스 노선이 늘고 대수를 증편했으며 지하철 5호선이 단계적으로 개통해 대중교통이 좋아졌다. 앞서 1980년대 개통한 서부간선도로가 목동을 고립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뒤였다.
목동신시가지아파트의 정주 여건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력있는 건축가가 설계하고 국내 대형 건설사가 시공한 단지는 쾌적한 거주 환경(용적률과 건폐율이 낮은 편)을 제공했다. 대형 평형 세대도 상당해 대가족 실수요자 이목을 끌었다. 목동종합운동장(1987년), CBS(1992년), 이화여대 목동병원(1993년) 등이 들어서면서 문화·의료 환경도 우수해졌다.
목동 이주·개발을 돌이켜보면 벌판이라는 지역 특성이 성공 원인으로 꼽힌다. 목동 지명은 유래가 정확하지 않지만 전해지는 구전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다. 목동(木洞)은 나무(木)가 빽빽하게 자란 지역이거나, 목초지가 펼쳐진 들판이어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 살기 적당했던 곳이다.
과거 연의동(골)(延義洞)로 불린 들판이 현재 서부트럭터미널(신정동)이고, 여기가 목동에 인접한 걸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서울 도심 최대의 평지로 꼽히는 지역이다. 목동 일대에 이렇다 할 문화 유적이 없는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목초만 무성한 곳이다 보니 대규모 촌락이나 주요 관청이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사가들은 공무원 유입이 목동 발전을 앞당겼다고들 한다. 서울시는 당시 미분양 난 목동 아파트를 공무원에게 특별 분양했다. 말이 특별 분양이지 반강제 분양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애먼 서울시와 관가 공무원들이 목동으로 전입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프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전재욱 (imfew@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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