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는 순간 자살하는 책”…86년째 금서로 남은 이란 사이코패스 소설 [나쁜 책]
여기, 저주 받은 소설이 있습니다. 이란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1903~1951)의 ‘눈먼 부엉이’입니다. 이란에선 절대 읽을 수 없는 금서, 유럽과 미국에선 걸작으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감히 ‘저주’란 단어를 언급한 이유는, 책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다 읽는 순간 자살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출간 당시 이 책의 일부 독자는 정말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소설 ‘눈먼 부엉이’는 1937년 첫 출간 뒤 86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란 내에서 독서가 금지된 책입니다. 2005년 테헤란 국제도서전 ‘공식’ 금서였고, 2006년엔 출판권을 국가가 몰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란 정부의 탄압 이면에서, ‘눈먼 부엉이’는 1990년 노벨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스, 영국 BBC 등 세계 작가와 언론의 격찬을 받았습니다.
이란이 잉태한 세계적인 걸작, 그러나 정작 이란에선 배척당한 책 ‘눈먼 부엉이’를 소개합니다.
공학도였던 헤다야트는 예술을, 특히 문학을 향한 욕망이 컸습니다. 헤다야트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는데, 이후 이란 국립은행에 근무하며 소설을 쓰는 이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헤다야트가 살았던 시대의 이란은 팔라비 왕조가 이끄는 쿠데타 왕정국가였습니다. 헤다야트는 예술가 모임을 결성하는 등 예술에 열정적이었지만, 정부는 헤다야트 작품을 검열했습니다.
고국 이란에서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자꾸만 꺾인 헤다야트는 인도 봄베이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무렵인 1937년, 헤다야트는 ‘복사본’ 형태로 소설 50부를 제본하고 지인들에게 선물합니다.
그 작품이 바로 소설 ‘눈먼 부엉이(The Blind Owl)’입니다.
그가 필통에 그려넣는 그림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 아래, 터번을 착용한 곱사등이 노인이 앉아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노인에게 꽃을 건네는 이미지였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 그림을 그렸는지, 실제로 봤던 장면인지 아닌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주인공 ‘나’는 포도주를 꺼내려다가 선반 위 벽에 뚫린 구멍으로 바깥 세상을 보게 됩니다. 벽틈 너머 사이프러스 나무, 곱사등이 노인, 꽃을 든 소녀가 보였습니다. 소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주인공은 소녀와의 만남을 갈망합니다.
급기야 소녀 몸에서 부패의 징후가 시작되고, 불행의 냄새가 방에 가득찹니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소녀의 몸을 하나씩 절단해 대형 가방에 넣은 뒤 집을 나섭니다. (사실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주인공은 혼란스럽습니다.) 그는 한 노인의 도움을 받아 소녀의 시체를 유기합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공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자신이 오래 전 ‘토막’냈다고 기억했던 그 소녀가 시한부 환자인 자신을 간호 중입니다. 의사는 주인공이 회복될 가망이 없자 고통을 줄여주려 아편을 투약한 상태였습니다. 주인공 ‘나’가 방금 경험했던 토막살해와 사체유기는 거짓된 환상이었던 것이지요.
주인공이 거울을 쳐다보니, 그곳에 곱사등이 노인이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네요. 주인공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늙어 죽어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아편에 찌들어 꾸는 꿈인지, 혹은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현실인지 불분명합니다.
바로 그때, 부엉이 모양의 그림자가 주인공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기름 램프의 빛이 만들어낸, 눈동자 없는 부엉이 모양의 그림자(주인공 ‘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눈먼 부엉이’가 금서로 낙인 찍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고국 이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불온한 우화로 읽힐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1921년 정권을 잡고 이란을 통치했던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왕조의 선대 왕)는 테헤란 예술가들을 탄압합니다. 서구적 문학 작법으로 기술된 사데크 헤다야트의 책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① 소설 ‘눈먼 부엉이’에서 필통 화가 ‘나’가 살아가는 닫힌 방은 왕정에 의해 억압받던 이란 시민의 내면 심리를 상징합니다. ② 몽유병 환자가 되어 방안에서 죽어버린 소녀는 인간의 원초적 순수성의 상실과 결핍을, ③ 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노인(주인공 ‘나’)은 이란 전체에 내려앉은 정신적 혼돈을 은유합니다.
따라서 ‘눈먼 부엉이’는 단지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한 병자의 나약한 정신분열적 사이코패스 고백록만이 아니라, 이란의 정치적 현실에 관한 우화로도 해석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문장마다 가득합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지요.
◎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아직 인간은 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7쪽)
◎ “내 인생 전체를 포도처럼 짜서 그 즙을, 아니 그 포도주를, 성수와도 같은 그것을 한 방울 한 방울, 내 그림자의 메마른 목구멍 안으로 떨어뜨리고 싶다. 한때 나였던 존재는 죽었다. 그것은 이미 부패가 진행 중인 몸에 불과하다. 나는 생이라는 포도를 짜내서, 그 즙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씩 떠서, 내 늙은 그림자의 메마른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어야 한다.” (61쪽, 64쪽 발췌)
◎ “이 세계는 텅 빈 슬픔의 집이었다. 나는 맨발로 슬픔의 집의 모든 방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가슴 속에 불안과 근심이 가득했다. 가장 마지막 남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힐 것이다.” (99~100쪽)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가기 시작하는 존재이므로 이 욕망은 결국 제거 당하기 마련이지요. 인간의 모든 욕망은 언젠가는 소멸합니다. 작가 헤다야트는 ‘삶에 대한 욕망’과 ‘필연적인 죽음’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인간의 슬픔이 발생한다고 봤습니다(“이 세계는 텅 빈 슬픔의 집이었다”). 헤다야트는 바로 그 지점을 소설로 진단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눈먼 부엉이’는 이란의 정치 현실을 고발하는 한편, 동시에 인간 보편의 운명을 움켜쥐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문학이란 불안한 현실의 첨예한 모순을 빼어난 상징과 은유로 고발하면서, 동시에 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숙명을 압축하는 글이 아니었던가요. 한 시대를 작동시키는 정신의 심장을 차가운 메스로 도려내면서, 모든 시대의 살갗에 접촉하며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을 주는 문학이야말로 참된 문학일 것입니다.
하크푸르에 따르면, 그녀의 집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동화책 같은 느낌의 책 제목에 이끌린 소녀 하크푸르는 아버지에게 그 책을 읽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하크푸르의 아버지는 딸에게 ‘눈먼 부엉이’ 독서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0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란이 낳은 최고 걸작이지만, 너무 위험한 책”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후 이란에서 너무 많은 자살을 야기했다. 그리고 꼭 알아야 한다면,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살했다(it had caused many suicides in Iran after it was published. And, well, if you must know, the author also committed suicide).”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하크푸르는 이 책을 손에 쥐어 탐독했고, 아버지가 ‘눈먼 부엉이’ 독서를 막았던 진의를 이해하게 되지요. 책의 위험성을 간파한 하크푸르는 이 칼럼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당신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눈먼 부엉이’를 읽은 일부 독자들의 우울증과 자살은 이 책에 담긴 문장들로 생(生)의 근원을 염탐했다는 좌절과 막막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삶에서 유의미성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들은 영영 삶을 포기한 것이겠지요.
물론 이 책도 이 글도, 삶을 지양하고 죽음을 찬미하려는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세상에 주어진 모든 삶에는 섭리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 죽음은 문학의 바깥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며, 죽음을 다룬 문학은 삶의 깊이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다만, 삶의 이유가 모두에게 다르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시키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다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만큼은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따라서 ‘눈먼 부엉이’는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란 교훈을 일러주는 소설입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헤다야트의 부엉이같은 ‘무엇’이 있진 않았던가요. ‘눈먼 부엉이’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이끄는, 위험하고도 유의미한 문제작입니다.
※다음주에는 미셸 우엘벡의 《복종》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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