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는 순간 자살하는 책”…86년째 금서로 남은 이란 사이코패스 소설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0. 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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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13]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여기, 저주 받은 소설이 있습니다. 이란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1903~1951)의 ‘눈먼 부엉이’입니다. 이란에선 절대 읽을 수 없는 금서, 유럽과 미국에선 걸작으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감히 ‘저주’란 단어를 언급한 이유는, 책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 책은 “다 읽는 순간 자살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출간 당시 이 책의 일부 독자는 정말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소설 ‘눈먼 부엉이’는 1937년 첫 출간 뒤 86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란 내에서 독서가 금지된 책입니다. 2005년 테헤란 국제도서전 ‘공식’ 금서였고, 2006년엔 출판권을 국가가 몰수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란 정부의 탄압 이면에서, ‘눈먼 부엉이’는 1990년 노벨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스, 영국 BBC 등 세계 작가와 언론의 격찬을 받았습니다.

이란이 잉태한 세계적인 걸작, 그러나 정작 이란에선 배척당한 책 ‘눈먼 부엉이’를 소개합니다.

이란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소설 ‘눈먼 부엉이’를 원작 삼은 동명 영화의 포스터. 키우마르스 데람바흐쉬 감독의 1974년도 영화입니다. ‘눈먼 부엉이’는 지금까지 총 3회 영화화되었습니다. [키우마르스 데람바흐쉬 공식 홈페이지 캡처]
테헤란 귀족 출신 천재 소설가의 ‘이중생활’
이란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는 1903년 테헤란 귀족 집안 출신의 천재 작가였습니다. 그는 프랑스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25년엔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벨기에로 떠나 수학했습니다.

공학도였던 헤다야트는 예술을, 특히 문학을 향한 욕망이 컸습니다. 헤다야트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는데, 이후 이란 국립은행에 근무하며 소설을 쓰는 이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헤다야트가 살았던 시대의 이란은 팔라비 왕조가 이끄는 쿠데타 왕정국가였습니다. 헤다야트는 예술가 모임을 결성하는 등 예술에 열정적이었지만, 정부는 헤다야트 작품을 검열했습니다.

고국 이란에서 예술에 대한 갈망이 자꾸만 꺾인 헤다야트는 인도 봄베이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무렵인 1937년, 헤다야트는 ‘복사본’ 형태로 소설 50부를 제본하고 지인들에게 선물합니다.

그 작품이 바로 소설 ‘눈먼 부엉이(The Blind Owl)’입니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생전 모습. 그는 국립은행에서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이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이란 현대소설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소설 ‘눈먼 부엉이’ 표지들. 맨 왼쪽은 작가가 인도에서 복사본 형태로 제작해 배본한 원본의 표지. 그 옆으로 차례대로 출간 75주년 기념 영문판, 2013년 배수아 번역 한국어판(문학과지성사 펴냄), 2015년 공경희 번역 한국어판(연금술사 펴냄). 이 기사는 배수아 작가의 번역본을 저본 삼았습니다.
‘눈먼 부엉이’는 무명(無名) 예술가인 주인공 ‘나’의 1인칭 독백 소설입니다. 그는 필통에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빈곤하고 궁핍한 필통 화가였습니다.

그가 필통에 그려넣는 그림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 아래, 터번을 착용한 곱사등이 노인이 앉아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노인에게 꽃을 건네는 이미지였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 그림을 그렸는지, 실제로 봤던 장면인지 아닌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주인공 ‘나’는 포도주를 꺼내려다가 선반 위 벽에 뚫린 구멍으로 바깥 세상을 보게 됩니다. 벽틈 너머 사이프러스 나무, 곱사등이 노인, 꽃을 든 소녀가 보였습니다. 소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주인공은 소녀와의 만남을 갈망합니다.

‘눈먼 부엉이’ 주인공 ‘나’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필통에 그리는 가난한 화가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도 사이프러스 나무가 자주 등장합니다. 작품은 고흐의 1890년작 ‘Road with Cypress and Star’.
놀랍게도 바로 그날 밤, 소녀가 주인공 ‘나’의 방안에 들어오더니 침대에 누워버립니다. 소녀는 몽유병에 걸린 것만 같았습니다. 말을 걸어보려다가 자세히 보니, 소녀는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그대로 숨이 멎은 상태였습니다.

급기야 소녀 몸에서 부패의 징후가 시작되고, 불행의 냄새가 방에 가득찹니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소녀의 몸을 하나씩 절단해 대형 가방에 넣은 뒤 집을 나섭니다. (사실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주인공은 혼란스럽습니다.) 그는 한 노인의 도움을 받아 소녀의 시체를 유기합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공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자신이 오래 전 ‘토막’냈다고 기억했던 그 소녀가 시한부 환자인 자신을 간호 중입니다. 의사는 주인공이 회복될 가망이 없자 고통을 줄여주려 아편을 투약한 상태였습니다. 주인공 ‘나’가 방금 경험했던 토막살해와 사체유기는 거짓된 환상이었던 것이지요.

주인공이 거울을 쳐다보니, 그곳에 곱사등이 노인이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네요. 주인공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늙어 죽어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아편에 찌들어 꾸는 꿈인지, 혹은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현실인지 불분명합니다.

바로 그때, 부엉이 모양의 그림자가 주인공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기름 램프의 빛이 만들어낸, 눈동자 없는 부엉이 모양의 그림자(주인공 ‘나’의 그림자)였습니다.

전 세계에 출간된 사데크 헤다야트의 소설책 표지. ‘눈먼 부엉이’가 헤다야트의 대표작이고 ‘세 방울의 피(Three Drops of Blood)’도 역작으로 꼽힙니다.
마약투약에 불륜 묘사, 게다가 이슬람 모독까지
이 몽환적인 소설은 왜 금서였을까요. 사체유기, 마약 투약, 불륜 묘사, 근친상간 등 선정적 소재가 책 곳곳에 가득한 이유도 있겠고, 이슬람을 모독하는 부분도 논란을 일으킬 만합니다.

그러나 ‘눈먼 부엉이’가 금서로 낙인 찍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고국 이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불온한 우화로 읽힐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1921년 정권을 잡고 이란을 통치했던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왕조의 선대 왕)는 테헤란 예술가들을 탄압합니다. 서구적 문학 작법으로 기술된 사데크 헤다야트의 책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소설 ‘눈먼 부엉이’에서 필통 화가 ‘나’가 살아가는 닫힌 방은 왕정에 의해 억압받던 이란 시민의 내면 심리를 상징합니다.몽유병 환자가 되어 방안에서 죽어버린 소녀는 인간의 원초적 순수성의 상실과 결핍을,망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노인(주인공 ‘나’)은 이란 전체에 내려앉은 정신적 혼돈을 은유합니다.

따라서 ‘눈먼 부엉이’는 단지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한 병자의 나약한 정신분열적 사이코패스 고백록만이 아니라, 이란의 정치적 현실에 관한 우화로도 해석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이란 테헤란 시내 중심가 모습. 중앙의 고층 타워가 한때 세계에서 8번째 높이였던 435m 밀라드 타워(보르제 밀라드)입니다. 2016년 초 이란이 잠시 외교 빗장을 열었을 때 현지 촬영된 사진입니다. [매경DB·김재훈 기자]
“인생 전체를 즙으로 짜 목구멍에 떨구고 싶다”
하지만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한때의 정치 현실을 고발하는 기능만 담당했다면, 금세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을 겁니다. ‘눈먼 부엉이’의 진짜 문학적 가치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와 영혼의 본질적인 고통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음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문장마다 가득합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지요.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아직 인간은 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7쪽)

내 인생 전체를 포도처럼 짜서 그 즙을, 아니 그 포도주를, 성수와도 같은 그것을 한 방울 한 방울, 내 그림자의 메마른 목구멍 안으로 떨어뜨리고 싶다. 한때 나였던 존재는 죽었다. 그것은 이미 부패가 진행 중인 몸에 불과하다. 나는 생이라는 포도를 짜내서, 그 즙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씩 떠서, 내 늙은 그림자의 메마른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어야 한다.” (61쪽, 64쪽 발췌)

이 세계는 텅 빈 슬픔의 집이었다. 나는 맨발로 슬픔의 집의 모든 방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가슴 속에 불안과 근심이 가득했다. 가장 마지막 남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등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힐 것이다.” (99~100쪽)

헤다야트의 집에 걸린 명패와 집 내부의 페르시안 장식들. [Maziar Abidian·Wikimedia Commons]
병상에서 아편에 취해 꿈을 꾸듯이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나’는, 부엉이 모습을 한 자신의 그림자에게 죄악과 불안을 고백합니다.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 속에서 보게 되는 소녀는,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가기 시작하는 존재이므로 이 욕망은 결국 제거 당하기 마련이지요. 인간의 모든 욕망은 언젠가는 소멸합니다. 작가 헤다야트는 ‘삶에 대한 욕망’과 ‘필연적인 죽음’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인간의 슬픔이 발생한다고 봤습니다(“이 세계는 텅 빈 슬픔의 집이었다”). 헤다야트는 바로 그 지점을 소설로 진단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눈먼 부엉이’는 이란의 정치 현실을 고발하는 한편, 동시에 인간 보편의 운명을 움켜쥐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문학이란 불안한 현실의 첨예한 모순을 빼어난 상징과 은유로 고발하면서, 동시에 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숙명을 압축하는 글이 아니었던가요. 한 시대를 작동시키는 정신의 심장을 차가운 메스로 도려내면서, 모든 시대의 살갗에 접촉하며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을 주는 문학이야말로 참된 문학일 것입니다.

이란계 캐나다인 마즈덱 태비 감독이 2015년 연출한 영화 ‘눈먼 부엉이’의 한 장면. 감독의 개인 홈페이지(mazdaktaebi.com)에서 제약없이 선명한 화질로 무료 관람 가능합니다(영어 자막). 헤다야트가 이 소설을 쓸 때는 없었던 TV가 등장한다는 점, 침대가 아닌 검은 소파가 놓여 있다는 점 등 현대적으로 변용된 부분이 있습니다. [마즈덱 태비 홈페이지 캡처]
소설 ‘눈먼 부엉이’를 원작 삼은 동명의 영화 포스터들.
‘This book Will end your L.I.F.E.’
소설 ‘눈먼 부엉이’에 얽힌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1978년생 이란 테헤란 출신의 미국인 작가 포로치스타 하크푸르는 ‘눈먼 부엉이’ 영문판에서 그녀 자신과 이 책의 긴 인연을 소개했습니다. (구글에서도 쉽게 전문 검색이 가능합니다.)

하크푸르에 따르면, 그녀의 집에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동화책 같은 느낌의 책 제목에 이끌린 소녀 하크푸르는 아버지에게 그 책을 읽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하크푸르의 아버지는 딸에게 ‘눈먼 부엉이’ 독서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0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란이 낳은 최고 걸작이지만, 너무 위험한 책”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출간 후 이란에서 너무 많은 자살을 야기했다. 그리고 꼭 알아야 한다면,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살했다(it had caused many suicides in Iran after it was published. And, well, if you must know, the author also committed suicide).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하크푸르는 이 책을 손에 쥐어 탐독했고, 아버지가 ‘눈먼 부엉이’ 독서를 막았던 진의를 이해하게 되지요. 책의 위험성을 간파한 하크푸르는 이 칼럼의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 당신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란계 미국인 작가 포로치스타 하크푸르가 2010년 쓴 ‘눈먼 부엉이’ 관련 칼럼. 아버지가 어린 자신에게 ‘눈먼 부엉이’ 독서를 막았던 이유에 대한 경험을 담담하게 적은 장문의 글입니다. [해당 홈페이지 캡처]
죽음 없는 삶도, 삶 없는 죽음도 없으니
이제 이런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왜 작가들은 우울하고 음험한 소설을 쓰고, 독자들은 음울한 소설에 매료되는 걸까요. ‘눈먼 부엉이’는 어떻게 숱한 논란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했을까요.

‘눈먼 부엉이’를 읽은 일부 독자들의 우울증과 자살은 이 책에 담긴 문장들로 생(生)의 근원을 염탐했다는 좌절과 막막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삶에서 유의미성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들은 영영 삶을 포기한 것이겠지요.

물론 이 책도 이 글도, 삶을 지양하고 죽음을 찬미하려는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세상에 주어진 모든 삶에는 섭리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 죽음은 문학의 바깥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며, 죽음을 다룬 문학은 삶의 깊이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다만, 삶의 이유가 모두에게 다르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시키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보다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만큼은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따라서 ‘눈먼 부엉이’는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란 교훈을 일러주는 소설입니다.

프랑스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위치한 사데크 헤다야트의 무덤. 묘비 좌측에 그려진 부엉이 한 마리가 인상적입니다. [Coffeetalkh·Wikimedia Commons]
‘눈먼 부엉이’ 속 주인공 ‘나’는 자신의 그림자 형상인 부엉이와 대화했습니다. 선반 위의 벽틈을 보는 건 주인공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행위이기도 했지요. 우리는 이처럼 자기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내면과의 대화 없이 삶은 완성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헤다야트의 부엉이같은 ‘무엇’이 있진 않았던가요. ‘눈먼 부엉이’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이끄는, 위험하고도 유의미한 문제작입니다.

사데크 헤다야트가 사용하던 책상. 그의 사후에 찍은 사진입니다. 벽에는 그의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사데크 헤다야트 재단·Wikimedia Commons]
이 기사는 다음 책과 논문, 웹사이트를 참고했습니다. ◎ 사데크 헤다야트, 배수아 옮김, 『눈먼 부엉이』, 문학과지성사, 2013년. ◎ 사데크 헤다야트, 공경희 옮김, 『눈먼 올빼미』, 연금술사, 2015년. ◎ POROCHISTA KHAKPOUR, 「THIS BOOK WILL END YOUR LIFE: THE GREATEST MODERN PERSIAN NOVEL EVER WRITTEN」(2010년 8월 기술된 글로 https://therumpus.net/2010/10/08/why-i-love-sadegh-hedayats-the-blind-owl/에서 전문 검색 가능함) ◎ 신규섭, 「20세기 중동을 움직인 인물 50선(選) - 문학, 예술: 영원한 자유인: 서덱 헤더야트」, 《중동연구》 제17권 제2호, 1998년, 454~459쪽. ◎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올빼미’ 소개 웹사이트 (blindowl.org)

※다음주에는 미셸 우엘벡의 《복종》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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