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핵핵’거리는 한반도…핵 고도화 vs 압도적 힘
“한반도에서 핵을 둘러싼 긴장감이 한층 위험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핵무기 폐기를 위한 오랜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국적 평화단체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ICAN)은 2023년 9월28일 내놓은 자료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ICAN은 ‘위기의 증후’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 북한이 한·미·일 3국 간 핵협력 심화에 맞서 ‘핵무기 고도화’를 헌법 조문에 명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북한 정권을 종식시킬 것”이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다. 지나치게 높아진 말의 수위가 행동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위태로운 정세 속에 지난 30여 년 이어진 북핵·미사일 문제 해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국가’ 북한, 안팎에 선언한 것”
북한은 2023년 9월26~27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국회 격) 제14기 9차 회의를 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일부 내용을 수정 보충하기로 의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의정(의안) 보고에 나선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국가 방위에서 차지하는 핵무력의 지위와 핵무력 건설에 관한 국가활동 원칙을 공화국의 기본법이며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위대한 정치헌장인 사회주의헌법에 규제하기 위하여 헌법수정 보충안을 심의 채택하게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연설에 나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우리가 이룩한 성과 중에 가장 큰 성과는 나라의 국가방위력, 핵전쟁 억제력 강화에서 비약의 전성기를 확고히 열어놓은 것”이라며 “강력한 방위력과 압도적인 공격력을 철저히 갖춘 공화국의 위력적 실상을 현실로 보여주는 이러한 눈부신 성과는 자기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건드리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조선의 담력과 결행력이 어떤 것인가를 명명백백히 증빙하여주었다”고 말했다.
이날 최고인민회의는 기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 인민적, 전 국가적 방위체계에 의거한다”고 규정했던 북한 헌법 제4장 58조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개정 58조는 “핵무기 발전을 고도화하여 나라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담보하고 전쟁을 억제하며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한다”고 못박았다.
서문과 7개장 172개조에 이르는 북한 헌법은 1948년 9월 제헌 이후 이번까지 모두 16차례 개정됐다. 옛 소련의 몰락과 냉전 해체 직후였던 1992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3차 회의(8차 개헌)에선 기존에 없던 ‘국방’에 관한 제4장이 신설됐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후인 2012년 4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2기 5차 회의(11차 개헌)에선 ‘핵보유국’이란 점을 헌법 서문(전문)에 명기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헌법 전문에 있던 ‘핵보유국’이 조문 안으로 들어왔고, 특히 ‘핵무기 고도화’를 명확히 밝혀 적은 것은 ‘핵국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안팎에 선언한 것”이라며 “심각한 상황”이라고 짚었다.
“우리 공화국이 세계 최대의 핵무기 보유국이며 가장 위험한 전쟁국가인 미국과 그 추종세력과의 장기적인 대결 속에서 자위를 위해 불가피하게 핵을 보유하였고 핵무력 강화 정책을 법화한 데 대하여서는 세계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 만일 우리 공화국이 계속 자중되어온 미국의 핵공갈과 위협 앞에서 남들의 핵우산에 막연한 기대를 걸고 앉아 있었거나 제국주의자들이 극성스레 광고하는 알량한 ‘선의’와 화려한 유혹에 환상을 가지고 핵보유 노선을 결단하지 못하였더라면 (…) 기필코 오래전에 핵 참화와 절멸의 재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미국서도 ‘비핵화’ 대신 ‘비확산’으로 주장 나와
이날 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어 그는 △확장억제 강화를 위한 한-미 핵협의그룹(NCG) 개최 △한-미 합동군사훈련 강화 △미국의 핵전략 자산 상시배치 수준 한반도 전개 등 2023년 4월 한-미 정상회담 때 발표한 ‘워싱턴 선언’의 핵심 내용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우리 공화국에 대한 핵전쟁 위협을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극대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핵무력 고도화’를 헌법 조문에 명문화한 ‘명분’인 셈이다.
특히 김 위원장은 “(미국은) 일본, ‘대한민국’과의 삼각 군사동맹 체제 수립을 본격화함으로써 전쟁과 침략의 근원적 기초인 ‘아시아판 나토’가 끝내 자기 흉체를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 무슨 수사적 위협이나 표상적인 실체가 아니니 실제적인 최대의 위협”이라며 “제국주의자들의 폭제의 핵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핵보유국의 현 지위를 절대로 변경시켜서도 양보하여서도 안 되며, 오히려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과 정부가 내린 엄정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핵위협에 맞서 핵무장을 했으며, 핵위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핵무력 고도화’를 멈추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한·미가 지난 30여 년간 북핵·미사일 문제의 해법으로 추진한 ‘비핵화’ 방식 대신 향후 ‘핵보유국 대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핵군축 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201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 뒤 단독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 보장 필요성과 함께 ‘핵군축’을 입에 올린 바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제6조는 “조약 당사국은 조속한 일자 내에 핵무기 경쟁 중지 및 핵군비 축소를 위한 효과적 조치에 관한 교섭과 엄격하고 효과적인 국제적 통제하의 일반적 및 완전한 군축에 관한 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성실히 추구하기로 약속한다”고 규정한다.
윤석열 정부 “한-미 동맹의 압도적 대응, 북한 정권 종식”
미국 내부에서도 ‘비핵화’ 대신 ‘비확산’과 ‘위협 감소’ 쪽으로 초점을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앞서 북핵·미사일 전문가인 제프리 루이스 미국 ‘제임스 마틴 비확산연구센터’(CNS) 동아시아 담당 국장도 2022년 10월13일 <뉴욕타임스>에 기고문을 보내 “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가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핵보유 및 핵무기 운용 원칙을 담은 ‘국가핵무력정책법’을 입법하고 핵무기를 포기할 뜻이 없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한 직후다. 그는 이렇게 썼다.
“냉전 시절에도 미국은 소련과 마주 앉아 핵전쟁의 위험을 낮추기 위한 방법을 논의했다. 하지만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그간의 모든 노력은 북한이 먼저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미국 쪽 고집 때문에 무위에 그쳤다. (…)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건 분명 고약한 일이지만, 미국은 이미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 당국자들이 김정은 정권의 핵프로그램을 용인할 수 없다고 말만 하는 사이, 북한은 계속 핵무기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 이제 손절(손해를 보더라도 적당한 시점에서 끊어내다)할 때가 됐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낮추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실패작’이자 ‘정치쇼’로 규정한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은 전혀 다른 거 같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힘에 의한 평화’를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기조로 강조해온 윤 대통령은 2023년 9월26일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핵무력 고도화’ 조항을 헌법에 담기 위한 논의를 하고 있을 때다.
“북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으며, 나아가 핵사용 협박을 노골적으로 가해오고 있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자, 세계 평화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 북한 정권은 핵무기가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한-미 동맹의 압도적 대응을 통해 북한 정권을 종식시킬 것이다.”
‘빌려온 힘’이라 그나마 다행?
국제정치학에서 ‘힘에 의한 평화’는 “한 국가가 축적된 군사력과 안보 자산을 바탕으로 여타 국가에 자국이 원하는 외교·안보적 환경을 강제하는 것”을 뜻한다. 1980년 미국 대선 때 현직이던 지미 카터 대통령(민주당)의 ‘안보 무능’을 비판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운 바 있다. 실제 그는 집권 뒤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소련과 무한 군비경쟁에 나섰고, 이는 소련이 붕괴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힘에 의한 평화’는 쉽게 ‘안보 딜레마’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나라의 안보 추구 행위가 상대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상대국도 이에 상응하는 안보 증강에 나서면서, 결국 자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정전 70주년을 맞은 남과 북이 교과서적인 사례다. 육군 대령 출신인 미국 역사학자 앤드루 베이서비치는 2010년 8월20일 시비에스(CBS)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군사력의 효용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불가피하게 이를 실제 사용하려는 유혹을 부른다. ‘힘에 의한 평화’는 쉽게 ‘전쟁에 의한 평화’로 변할 수 있다.”
북한의 개헌 소식이 전해진 2023년 9월28일 통일부는 성명을 내어 “한·미·일의 압도적 대응과 국제사회의 공조하에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억제하고 단념시켜나가겠다”고 밝혔다. ‘한·미·일’과 ‘국제사회’가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힘에 의한 평화’의 실체인 셈이다. ‘빌려온 힘’이라 함부로 쓸 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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