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주입하면 알아서 척척? 일장춘몽 ‘전문가시스템’
프로그래밍 언어 ‘리스프’ 힘입어
컴퓨터시스템·지질탐사 AI 성과
전문지식 추출 어려운 분야 많아
얼마 안가 쇠퇴…사용자 능력 중요
대개 지능은 곧 이성이고, 이성은 논리적으로 작동한다고 여긴다. 논리는 기호로 표현되고, 지식은 논리 기호로 구성된 명제로 옮겨 적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호로 표현된 명제들을 논리 연산하는 기계로 발달시키면 인공지능(AI)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956년 다트머스 워크숍에서 허버트 사이먼과 앨런 뉴얼은 이런 내용을 발표했고, 주최자인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이먼과 뉴얼이 소개한 초보적인 논리추론 프로그램은 기계어에 가까운 어셈블리어로 짠 것들이었는데, 매카시와 민스키는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매카시의 주도로 훗날 1세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로 자리매김된 리스프(LISP) 개발이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진행됐다. 1962년 매카시가 스탠퍼드대학으로 초빙될 무렵 완성된 리스프는 당대의 프로그래밍 언어와 많이 달랐다.
컴퓨터 시스템 구축 ‘엑스콘’의 성공
과학기술용 수치계산용 언어인 포트란이나 기업용 정보처리 언어인 코볼 모두 변수의 내용이 수치인지 문자인지 미리 지정해야 하지만, 리스프는 변수로 넣을 수 있는 내용에 제한이 없었다. 심지어 프로그램 작동 중 그때까지의 연산 결과를 반영한 문자열을 만들어 변수에 넣고, 그 변수를 마치 프로그램의 일부인 양 실행할 수 있는 자기변형 기능이 있었다. 인간이 학습하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일신우일신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었다. 민스키는 프로그램 소스코드와 데이터 그리고 중간 연산 결과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리스프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불렀다.
자연히 초기 인공지능 개발연구자들은 각자의 개발 환경에 맞춰 제작한 리스프 버전들을 사용했다. 때로는 리스프의 자기변형 기능을 이용해서 특정 개발 프로젝트용 프로그래밍 언어를 새로 정의해서 쓰기도 했다. 스탠퍼드대학의 에드워드 파이겐바움은 전문가의 지식을 명제로 바꿔 입력하면 전문가 못지않은 ‘전문가시스템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고, 감염병 환자의 증상에 맞춰 항생제를 처방하는 인공지능인 ‘마이신’ 개발을 지도했다. 연구 성공 사례들이 뒤이었다. 그러나 많은 프로젝트가 가능성을 입증했음에도 실용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 혹독한 ‘인공지능 겨울’이 닥쳤다.
미국의 인공지능 학계는 1979년에야 미국인공지능학회(AAAI)를 결성해 지원을 호소했다. 이듬해 8월 개최된 첫 학술대회에서 잭팟이 터졌다. 카네기멜런대학의 연구원 존 맥더멋이 디지털이퀴프먼트에 납품한 엑스콘(XCON) 사례를 발표한 것이다. 엑스콘은 주문한 컴퓨터 시스템 구성품 목록이 제대로 구성됐는지 점검하는 전문가시스템형 인공지능이었다. 당시는 컴퓨터 회사마다 독자 규격의 부품들을 사용해서 고객 맞춤형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납품하던 시대였다. 세일즈 엔지니어가 고객과 상담해서 연산장치 기판, 메모리 기판, 저장장치들부터 전원장치, 각종 연결 케이블, 케이스 그리고 터미널까지 필요한 구성품 목록을 모아 견적서를 만들고, 설치팀이 배송된 구성품들로 현장에서 조립,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대형 컴퓨터 시스템인 메인프레임을 대기업 위주로 납품하는 아이비엠(IBM)과 달리, 디지털이퀴프먼트는 중소 규모 컴퓨터 시스템인 ‘미니컴퓨터’ 여러 종류를 다종다양한 거래처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성장해서 아이비엠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니컴퓨터 한 종류에 조합 가능한 구성품은 2천~3천종이었다. 자연히 현장 설치팀이 구성품들을 잘못 배송하는 사례들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년 만에 컴퓨터 시스템 구축 전문가시스템형 인공지능 엑스콘을 완성했다. 맥더멋은 1978년 12월부터 넉달 동안 미니컴퓨터 두 종류의 설치 매뉴얼을 반복해서 읽으며 한 구성품이 견적서 목록에 있을 때, 함께 목록에 올라올 수 있는 구성품들과 올라오면 안 되는 구성품들을 구분하는 규칙을 찾아냈다. 이미 리스프로 만든 구성 규칙 점검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었던 덕분에 혼자 찾아낸 규칙들을 모아서 어렵지 않게 전문가시스템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다음 넉달은 디지털이퀴프먼트 제작공장의 시스템 구성 전문가들의 검토를 받으며 프로그램이 작성한 견적서 목록의 오류를 찾고, 잘못된 구성 규칙을 찾아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마지막 넉달은 다른 미니컴퓨터 시스템의 구성 규칙도 입력해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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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전문지식
엑스콘이 현업에 적용된 1980년 1월부터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디지털이퀴프먼트는 엑스콘 덕분에 매년 2500만달러 규모의 이익을 더 올리게 됐다고 공언했다. 기업들에 투자가 몰려드는 전문가시스템 붐이 시작됐다. 1982년 9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의한 숨겨진 광맥 인식’이란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에스알아이(SRI)사가 미국 연방정부 지질조사국의 의뢰로 개발 중인 ‘프로스펙터’가 새 몰리브덴 광맥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프로스펙터 프로젝트는 전문가시스템형 인공지능이 광물 탐사에 도움이 되는지 탐색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인공지능이 완성되기도 전에 실용적인 새 지식을 창출했다고 선언했다. 다른 기업의 성공 사례도 알려졌다. 아멕스사는 신용거래 승인 보조 전문가시스템을 개발해서 시간당 승인 건수가 20% 증가하는 동시에 신용 위험이 대폭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1987년 전문가시스템 개발의 대부인 파이겐바움은 기업들의 전문가시스템 도입 성공 사례들을 모은 책 ‘전문가시스템 회사의 흥성’(The rise of the expert company)을 자랑스럽게 출판하면서 전문가시스템 인공지능의 미래라고 홍보했다. 이때가 절정이었다.
1988년 하반기부터 경영전산학 학술지들은 전문가시스템이 망한 이유를 논하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들이 정한 컴퓨터 규격이나 지질학자들의 자연과학 지식은 명제로 추출하기 쉬웠지만, 대부분의 산업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맥더멋이 후일 지적했듯이 전문가시스템을 개발해달라고 하는 의뢰인들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내심 알아도 명료하게 말하지 못했다. 또 가장 유능한 전문가일수록 인공지능 개발자와 인터뷰할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논리 추론 프로그래밍보다 전문가시스템을 개발하는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목적에 맞게 인간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추출하고 관리하는 일이 더 큰 난관이었던 것이다.
1990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때 4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던 전문가시스템 시장이 잘해봐야 6억달러 규모밖에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장밋빛 전망에 속았다는 한탄조였다. 1990년대 중반에 진행된 경영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그동안 개발된 전문가시스템들 중 3분의 1만이 어느 정도 사용되고, 6분의 1은 원한다면 써볼 수는 있는 정도로만 잔존했다. 나머지는 사라졌다. 경영진이 바뀌면 관심이 사라져 후속 업데이트가 멈추면서 효용이 떨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전문가시스템 때문에 전문지식을 쌓을 기회가 줄어들고 통제만 강화된다는 사람들의 불만도 많았다.
또다시 인공지능 붐을 맞이해, 인공지능 도입 여부만 강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사용자의 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해야만 투자의 성과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은 이미 30년 전에 나왔다.
과학저술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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