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변철학, 성리학적 사유의 모순과 한계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3. 10. 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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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8회>

강희언(姜熙彦, 1710 - ?)의 “사인삼경(士人三境)” 중에서 “사인시음(士人詩吟)>, 지본담채, 26cm x 21cm. /공공부문

13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600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대다수 식자층은 성리학(性理學)에 빠져서 살았다. 아직도 한국 지성계에는 성리학의 유풍이 남아서 지식인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성리학의 영향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과연 성리학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무엇을 남겼나? 성리학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성리학의 퇴조로 20세기 이후 한국인은 어떻게 탈바꿈했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 유학의 최고봉이라 존경받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1)의 이야기를 한 번 더 살펴보자.

퇴계 이황의 존재론적 의문

이황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주희(朱熹, 1130-1200)의 문집을 뒤적이며 “리도(理到)”의 의미를 궁구하고 있었다(변방의 중국몽 7회). 그는 “리도”의 의미를 “리가 이른다, 리가 다가온다, 리가 도달한다”는 의미로 풀어서 스스로 최후의 테제,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이황은 주희의 문집에서 “리도”의 몇몇 용례를 발견하고서야 드디어 리의 활동성, 자발성, 작용성을 확신했다.

주희는 리가 “감정도 의지도 없고, 계산도 헤아림도 없고, 만들고 지어냄도 없는” 보편적 원칙, 일반적 법칙, 자연적 섭리라 정의했다. 주희에 따르면, 형체를 이룬 대우주의 만물은 이미 리를 구현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기(氣)의 세계가 펼쳐지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리의 발현일 뿐, 기(氣)를 떠나 리만 따로 논할 수는 없다.

이에 반해 만년의 퇴계는 “리가 스스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주희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숙지했던 이황은 왜 그 가르침을 거슬러 리의 운동성, 능동성, 작용성을 강조했을까? 만약 리가 운동성을 갖고서 스스로 만물에 다가간다면, 초월적 존재로서의 리가 물질세계로서의 기와 분리된다는 존재론적 이원론(二元論, dualism)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위험을 몰랐을 리 없는 이황은 왜 그토록 리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명제에 집착했을까?

이에 대해서 21세기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황이 주희가 살았던 남송(南宋) 시대 복건(福建) 지방 학자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해서 주희의 원의(原意)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고문만 주로 읽은 조선 유생들의 중국어 실력 부족에서 기인한 단순 오해였다는 지적인데, 크게 설득력이 없다. 물론 고문(古文)으로 사유하고 문장을 지은 이황이 복건 지방 학자들의 고백화(古白話, 초기 백화) 문장에 달통하지 않았을 순 있다. 그렇다 해도 한평생 주자학을 섭렵한 대학자가 주자의 문장을 잘못 해석해서 주자의 이기론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고문과 백화를 당시 중국인만큼 잘해서 주희의 문장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해독한다고 해도 탐구심을 가진 학자라면 이황처럼 그런 의문을 제기해야 옳다.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를 캐묻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리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최초의 원인을 궁구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주자학이 이론적으로 완벽하다고 맹신하고서 답습하는 자들야말로 지적 예속성을 보인다.

이황이 그토록 리의 운동성을 강조했던 이유는 주자의 제자로 살았던 이황 자신의 학술적 의문 및 실존적 방황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그는 주자의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주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사로잡혔을 수 있다. 세상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도 모든 인간의 의문에 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평생 주자를 정신의 스승으로 섬겼던 이황의 실존적 위기감과 존재론적 의구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인간이 캄캄한 무지 상태로 태어나서 무지에 파묻혀 살다 무지 상태로 죽어 갔다. 제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존적 공포에 휩싸여 풀리지 않는 존재론적 물음을 붙들고 깊은 시름을 할 수밖에 없다. 한평생 유가 경전을 읽고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도 인간이라면 죽음의 두려움과 무지의 공포를 극복할 길은 없다.

비단 이황만이 아니었다. 동시대 제수이트 선교사들을 만나 감화받은 명나라 유생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들이 대체 왜 전통의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갔을까?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중국학자 피터슨(Willard J. Peterson)은 그들이 유교에선 말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라는 개념에 설득되었다고 논증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주자의 이기론으로는 존재론적 의문을 풀 수가 없었던 퇴계는 만년에야 “리도”의 테제를 세워서 그 문제에 답하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200여 년 뒤 정약용이 서학(西學)을 접하고서 천주교(天主敎)에 귀의했던 연유도 다르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청나라 만주의 한 서당에서 유가 경전을 학습하는 아동들. /R. Van Bergen, The Story of China (New York: American Book Company, 1902, 1922)

실제로 유교의 가르침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도리에 관한 당위론만 설파할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삶과 죽음의 근원적 물음에 관해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제자 계로(季路)를 향해 공자는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고 반문했다. 죽음에 대한 공자의 겸허한 침묵은 유학이 현세간(現世間)의 철학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전파된 불교(佛敎)가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다. 유교와 달리 불교는 겁(劫)의 시간을 거슬러 카르마(karma)의 법칙을 설명하고, 누구나 자기 향상의 노력으로 해탈(解脫)을 이루고 열반(涅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주희는 불편부당한 자연적 섭리로서의 리를 깨닫게 되면 보편타당한 인간의 도리도 훤히 알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과연 미욱한 인간의 머리로 대우주의 원리와 자연계의 이치를 일순간 훤히 깨닫는 게 가능한가? 광막한 대우주의 원리가 리와 기라는 관념의 조합으로 밝혀질 수 있는가? 인간의 언어로 대자연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나? 주자가 말하는 활연관통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이 풀릴까?

이러한 근본적 질문들에 대해서 과연 몇 명이나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리학은 기껏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기 수양의 비전일 뿐, 그 가르침을 아무리 답습해 봐야 근원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의구심을 해소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이황은 의도적으로 주자의 일반론을 거슬러 리도(理到)의 테제를 세우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황의 시도 자체가 마치 큰 잘못이나 된다는 듯 주자의 본의를 오해했다고 공격하는 율곡(栗谷) 학파의 태도가 오히려 폐쇄적이고 교조적일 수도 있다.

광대무변한 대우주에 리가 있다는 주희의 주장에 대해 철학자라면 당연히 “리는 대체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소?”하고 물어야 한다. 그렇기에 “리자도설”이야말로 성리학적 사유의 내재적 모순과 이론적 한계를 직시했던 이황의 근원적 문제 제기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성리학적 사유의 모순과 한계는 무엇인가?

주자학은 중세 사변철학의 전형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분류하자면, 주자학은 전형적인 사변철학(思辨哲學, speculative philosophy)이다. 여기서 사변(思辨)이란 선험적인(先驗的, a priori) 직관에 따라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중세적 사유 방식을 이른다. 사변철학은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 경험적 근거를 결핍한 채로, 언어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직관적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중세적 논증 방식이다.

인간의 자연언어를 사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서양의 중세 철학이 사변철학의 전형이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Anselmus, 1033/4-1109)는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신이 존재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 전통이 실로 오래 남아서 18세기에 이르러서도 독일의 철학자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변철학의 한계와 오류를 밝히기 위해서 근세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인간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알고 신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려면 무엇보다 인식 능력과 한계에 관한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 근세 영국 경험론을 접하면서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났다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본격적인 인식비판(Erkenntniskritik)을 전개했다.

비판 철학으로 계몽주의를 주도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초상화. /공공부문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외부 세계와 접촉할 때 인간은 감관(感官)을 통해 자극을 수용한다. 그렇게 형성된 감각이 인식의 출발점이다. 이때 인식은 외부 세계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가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인식 기관에 들어와서 이미 변형된 상태이다. 그렇게 수용된 감각을 인간은 고유의 순수이성으로 분석·처리하여 개념적 인식에 도달한다. 칸트는 인간의 모든 인식이 인간의 주관적 구성물(subjective construct)이라 주장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다만 감관을 통해 수용된 외부 세계의 경험을 인간 고유의 이성으로 처리하여 지식을 형성한다. 인간은 오직 의식 속에서 외부 세계를 주관적으로 구성할 수 있을 뿐, 자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능력도 없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논증한 철학자였다.

칸트의 인식비판에 비춰보면, 성리학은 정교한 논증을 통해서 확실한 앎에 도달하는 엄밀한 철학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리와 기 개념을 조합해서 우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저 광대한 우주를 관념어로 묘사했을 뿐, 성리학자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밝혔다고 생각할 순 없다.

결국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가 전한 경(經)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라서 배우고 익히면 우리도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전통적 믿음에 근거한 실천적 자기완성의 공부일 뿐이다. 실제로 성리학자들은 인격 수양을 통해서 도(道)를 체인(體認)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인격의 최고 경계(境界) 혹은 경지(境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리학적 진리란 믿음의 대상일 뿐, 확실한 앎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철인들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 대한 메타적 반성이 없이, 객관적 경험 세계에 관한 정교한 탐구도 없이, 방구석에 정좌(靜坐)한 채로 내면적 직관에 의존하여 범우주적 진리와 인간의 도리를 증득(證得)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퇴계와 율곡은 그러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활동했던 중세적 사변 철학자들이었다.

주자학의 절대화, 이념적 독단과 지적 편향성 낳아

조선 주자학의 기본 전제는 주자가 진리를 설파했다는 독단적 믿음이었다. 주자가 진리를 밝혔다는 전제 위에서 그들은 주자의 글을 통해서 그 진리를 증험(證驗)하려 했다. 주자의 가르침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는 순간, 주자학은 철학의 외피를 쓴 종교가 되고 만다.

이미 종교화되었기에 조선 사상사는 후기로 갈수록 더더욱 주자학 일변도에 기울었다. 조선 유생들은 유가 경전 속에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고 성리학의 가르침이 그 진리를 터득하는 가장 요긴한 길이라 맹신했다. 인간 이성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인식비판도 없이, 성리학적 사변의 타당성을 정교하게 비판도 없이, 그들은 무조건 주자학을 맹신하는 이념적 경화와 지적 편향성을 보였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1910년 이전. /공공부문 (commons.wikimedia.org)

유가 경전의 권위가 절대화될수록, 유가 경전의 언어로 전개된 철학 논의는 논리적 정합성을 결핍할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유의 부족과 논리적 추론의 결핍은 서구 지적 전통과 대별되는 중화 문명의 지적 특징이다. 반면 중국 지적 전통에서 강점을 꼽으라면 논리적 정합성 대신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시적 정합성(poetic coherence)을 들 수 있다. 중국 문학 특유의 화려한 변려체(騈儷體) 문장처럼 대구를 이루며 끝없이 전개되는 음양(陰陽)과 이기(理氣)의 영구 순환론이 중국적 사유를 지배했다.

그러한 중화 문명 특유의 시적 정합성이 성리학의 외피를 쓰고 조선 사상사를 500년 넘게 지배했던 것은 아닐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방어적으로 성리학을 미화하는 대신 성리학적 사유의 한계와 모순을, 문제점과 부족함을 더 냉철하게 비판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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