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작을 걸작으로 재탄생시키려 분투했지만…“어찌되었건, 역시 김지운”
제작자·문공부 간섭 피해
이틀간 결말 재촬영 해프닝
김지운 감독의 ‘영화 속 영화’
실패 예견된 자의식 탐구 시도
“글쓴이는 40년 전으로부터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것인가?”
얼마 전 ‘손희정의 영화담’에 달린 댓글이다. 본문이 아니라 지면 소개에 대해 반응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댓글을 쓴 사람은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된다”는 문장을 콕 집어서 “40년 전 이야기”라고 놀렸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 한국 영화산업은 수익의 약 80%를 극장 매출에 기대고 있었으므로 이런 비아냥거림은 과장에 불과하지만, 지난 3년간 극장이란 플랫폼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는 잘 보여주는 반응임엔 틀림없다. 이제 함께 영화를 보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건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여성 캐릭터 전복’ 김기영 작품 패러디
이 서글픈 시절과 어울리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이다. 영화는 1970년대 유신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이 자신의 망작을 걸작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김지운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래도 영화 이야기인데, 어렵고 힘들더라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공인된 영화사에 기록된 최초의 영화는 1895년 12월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 그랑 카페에서 유료로 상영한 ‘기차의 도착’이다. 동영상 카메라의 탄생일이나 촬영자가 그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확인한 시점도 아닌, 대중 관객이 입장료를 내고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을 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바로 그 순간이 영화의 탄생을 규정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 역시 오티티(OTT) 시대에 영화 자본으로 극장 개봉작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영화’라는 말에 담고 있었다.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유료 상영과 함께 영화는 ‘기술’이자 ‘기록’에서 ‘상품’으로 도약했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인’들은 영화가 대량 복제되는 상품 그 이상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영화 속 감독 김열이 열에 들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시 찍지 않으면 영원히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는 자신이 연출한 치정물, 그 싸구려 상품의 마지막 부분만 다시 찍는다면 시장과 국가의 논리를 뛰어넘는 예술이 탄생할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다. 제작사 대표는 “그냥 하던 거나 하라”며 그를 무시하고, 유신 체제의 문공부는 바뀐 시나리오가 반체제적이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촬영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김열에게 단 이틀의 재촬영 기회가 주어지지만, 주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바뀐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종 사건·사고가 정신없이 터진다.
김열은 여성 캐릭터를 기존의 “남자에 헌신하고 가족에 희생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에서 “자기주장 확실하고 경제관도 뚜렷한 신여성”으로 바꾸면서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때 같은 제목의 영화 속 영화에서는 노골적으로 김기영 감독의 역사에 길이 남은 ‘괴작’들을 패러디하고 있다. 실제로 김기영 감독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생명력을 바탕으로 하는 관리 노동 및 돌봄 노동을 문명의 원천으로 다루었고, 그의 작품에서 시답잖은 가부장제를 뒤엎는 가능성 역시 여자들의 ‘무시무시한 욕망’으로부터 배태되었다.
김지운은 이 사회가 천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안에 인간사의 진실이 놓여 있다는 통찰과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대체 불가능한 영화미학을 김기영으로부터 빌려오고자 했다. 김지운의 다른 얼굴인 김열이 모두의 불신에도 고집하는 ‘플랑 세캉스’(한번의 촬영으로 길게 완성되는 ‘한 장면 한 컷’)는 김열-김지운의 속물적인 인정 욕구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온한 에너지를 포착하는 정확한 영화언어가 위대한 영화를 탄생시킨다는 김열-김지운 감독으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작가이자 실무자인 김열은 제작자와 정부 관계자, 배우와 스태프들의 비위를 가능한 한 맞춰주면서도 플랑 세캉스만은 양보하지 않는다. 그에게 영화란 그처럼 상품과 예술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긴장과 타협의 산물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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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인의 서글픈 초상
‘거미집’은 영화 창작에 대한 영화, 즉 메타영화다. 2023년 한국에서 메타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건 불가능한 임무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영화의 죽음을 서글퍼하는 건 오직 한 줌의 ‘영화인들’뿐이다. 그런 와중에 영화감독의 자의식 탐구에 관심을 가질 대중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팬덤이 아니라면 ‘메타’적인 작업을 향유하는 대중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것이 해석 싸움이 된 듯 보이는 상대주의의 시대에도 실제로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정성이 필요한 해석 실천은 인기가 별로 없다. 맥락은 무시한 채 내가 원하는 것만을 보고자 하는 아집이 곧 해석이 되는 때에 ‘메타’란 번거롭고 귀찮은 과정일 뿐이다.
이에 더해 ‘거미집’이 메타영화로서의 자의식만큼이나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불온함을 제대로 탐색하고 대단한 미학적 파격을 이루어냈는가 하면, 또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아쉽다. 영화 속 영화는 이미 더 탁월한 원본을 가지고 있는 복제물이고, 영화 그 자체는 몇년 전 세계 영화인들을 이미 한번 발칵 뒤집어 놓았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뛰어난 메타픽션(등장인물이 작품 속 세계를 허구라고 인지하는 설정의 창작물)인 ‘버드맨’으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뼛속까지 영화인인 김지운의 영화 탐구도 실패했다. 그리고 영화 속 영화 엔딩에 등장하는 거미줄에 꽁꽁 싸인 채 거대한 거미의 먹잇감이 되기를 기다리는 인간 군상은 지금 한국 영화인들의 서글픈 초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은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거미집’은 같은 이름의 영화 속 영화 시사회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 영화의 끝을 알리는 자막 이후 송강호·장영남 등 실제 ‘거미집’ 배우의 이름이 뜬다. 나는 거기서 ‘거미집’ 자체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출연진 자막에 이어 갑자기 기립박수를 받는 김열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기립박수는 ‘거미집’ 엔딩 후에 찾아오는 시간이며, 김열의 경험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김지운의 꿈이다. 그리고 김지운-김열의 표정은 이 순간이 얼마나 허망한 거짓인지 관객들에게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어찌되었건, 역시 김지운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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