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어머니라는 이름, 딸이라는 책임으로’ 샴페인 코지 에끌라 브뤼
한 사회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알고 싶다면
술잔 밑바닥을 들여다보라
맬러리 오마라, 미국 영화 제작자·작가
술에는 유리천장이 없다.
오히려 유구한 주류(酒類) 역사를 보면 여성이 맡은 역할이 더 컸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가히 중요하다 싶은 변곡점에 속속 여성이 등장한다.
고대 여성들은 직접 술을 만들고 즐겼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술의 여신 닌카시와 하토르가 존재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술과 유흥의 신 디오니소스가 나오기 이전 일이다.
중세에는 수녀원에서 빼어난 와인이나 맥주를 빚은 수녀들이 있었다. 근대 들어선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를 지금과 같은 보드카 제국으로 올려놨다.
현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걸출한 여성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주류 문화를 이끈다. 현 시점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와인 평론가이자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잰시스 로빈슨은 여성이다. 현존하는 와인 가운데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도멘 리로이(Leroy)’ 역시 랄루 비즈-리로이(Lalou Bize-Leroy)라는 할머니 손에서 나온다.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도 다르지 않다. 샴페인은 그 자체로 승자(勝者)를 상징한다. 샴페인에서 피어 오르는 거품은 곧 기품(氣品)이다. 가격과 인지도 면에서 다른 스파클링 와인을 압도한다. 샴페인이라는 이름은 오로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에만 붙일 수 있다.
샴페인이 지금처럼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여성이 서 있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샴페인 하우스 뵈브 클리코 경영자 바브 니콜 폰사르댕 여사는 우리가 아는 샴페인 기초를 최초로 정립했다.
그는 샴페인에서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푸피트르(pupitres)를 개발했다. 푸피트르 개발 이전까지 샴페인은 탁했다. 익히 알려진 황금빛 투명함 속에 잔잔한 거품이 올라오는 샴페인은 푸피트르 개발 이후 나타났다. 유독 작황이 좋았던 한 해 포도만 골라 빈티지(vintage) 샴페인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인물도 폰사르댕 여사다.
루이스 포므리 여사도 빼놓을 수 없다. 150여년 전까지 샴페인은 설탕을 녹인 술에 가까웠다. 샴페인은 양조 기법상 효모 찌꺼기를 빼낸 다음, 당분을 인위적으로 보충한다. 19세기 중반까지 보통 샴페인 1리터에 적게는 100그램에서 많게는 300그램까지 당분이 들어갔다.
1874년 포므리 여사는 과감하게 당분 보충량을 이전 대비 3~4% 수준으로 줄였다. 단 맛으로 샴페인을 마시기 보다 숙성한 샴페인 원액 맛과 향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포므리 여사가 처음 시도한 브뤼(brut) 스타일 샴페인은 최대 당도가 1.2%에 그친다. 이전까지 300그램이 들어갔던 당분이 최대 12그램 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설탕 맛이 고유한 풍미를 가리지 않은 포므리 샴페인에 열광했다.
이후 다른 샴페인 하우스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지금은 브뤼 스타일 샴페인과 이보다 더 적은 당분을 넣은 브뤼 나튀르(brut nature) 스타일 샴페인이 전체 샴페인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를 넘는다.
코지(Cossy)는 폰사르댕 여사와 포므리 여사가 닦아 놓은 여성 샴페인 명인(名人) 길을 따르는 샴페인 하우스다. 샹파뉴 지역에서는 샴페인을 만드는 양조장을 샴페인 하우스라 부른다.
샴페인 하우스 코지는 1764년 문을 연 260년 역사를 자랑한다. 처음부터 유명한 집은 아니었다. 샹파뉴 지역에서도 내로라하는 알짜배기 지역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력이 부족했다. 설입 이후 초기 200여년은 주로 큰 샴페인 하우스에 포도 원액을 공급했다.
코지라는 브랜드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기는 세운 지 190여년이 지난 1950년대다. 이후 1970년대 들어 프란시스 코지가 아내 제네비브와 함께 본격적으로 브랜드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부부가 힘을 합친 30여년 동안 샴페인 하우스 코지는 품질이 일취월장했다. 생산량을 늘리면서 프랑스 내수 시장을 넘어 수출을 시작했다. 품질이 뒷받침되자 샹퍄뉴 생산자 조합에서 프란시스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2009년 프란시스가 별안간 세상을 떠났다. 기둥이었던 그가 떠난 샴페인 하우스에는 아내 제네비브와 스물다섯 젊은 딸 소피 코지 모녀만 남았다. 제네비브는 남편과 30년 넘게 샴페인을 만들었지만, 한 해도 작업을 주도한 적은 없었다. 딸 소피는 오래 전 집을 떠나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가업이었던 샴페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세간에서는 모녀가 포도 재배부터 양조까지 핵심 기술을 모두 총괄했던 프란시스의 부재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250년 가까이 유지했던 샴페인 하우스를 팔아 치울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프랑스는 물론 여러 와인 생산국에는 비슷한 이유 탓에 매물로 나오는 와이너리가 부지기수다. 일부 평론가들은 모녀가 샴페인 하우스를 팔지 않더라도 이전같은 품질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녀는 샴페인 하우스를 팔지 않았다. 대신 백지에서 다시 시작했다. 소피는 지하 셀러에서 아버지 프란시스가 만들어 놨던 예전 샴페인을 맛보며 스스로 양조 기법을 익혔다. 제네비브는 30년간 어깨 너머로 지켜봤던 프란시스의 비법을 딸에게 최대한 구체적으로 전수했다.
어머니와 나는 계속 나아갔다.
더 빨리 배우기 위해 무엇이든지 시도했다.
때로는 잘못했지만, 곧 다시 시도했다.
무조건 집을 다시 세워야 했다.
소피 코지
아버지 프란시스가 샴페인을 만들던 당시 샹파뉴 지역에서는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잡초를 죽이는 제초제를 으레 사용했다. 소피는 관습을 거부했다. 말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을 사용했고, 제초제와 살충제 사용도 멈췄다. 현대적인 설비와 양조기법도 꾸준히 접목했다.
아버지가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샴페인 생산자 조합은 그 공로를 인정해 2016년 소피에게 ‘올해의 샴페인 생산자 상’을 수여했다.
샴페인 코지 에끌라 브뤼는 소피 코지가 만드는 기본급 샴페인이다. 에끌라는 프랑스어로 빛을 뜻한다. 포므리 여사가 처음 시도한 브뤼 스타일로 만들어 과한 당도 대신 입안 가득 퍼지는 상큼한 산미를 강조했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스파클링 와인 5만~10만원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연일주류수입판매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4만전자 코 앞인데... “지금이라도 트럼프 리스크 있는 종목 피하라”
- 역대급 모금에도 수백억 원 빚… 선거 후폭풍 직면한 해리스
- 국산 배터리 심은 벤츠 전기차, 아파트 주차장서 불에 타
- 금투세 폐지시킨 개미들... “이번엔 민주당 지지해야겠다”는 이유는
- [단독] 신세계, 95年 역사 본점 손본다... 식당가 대대적 리뉴얼
- [그린벨트 해제後]② 베드타운 넘어 자족기능 갖출 수 있을까... 기업유치·교통 등 난제 수두룩
- [보험 리모델링] “강제로 장기저축”… 재테크에 보험이 필요한 이유
- “요즘 시대에 연대보증 책임을?” 파산한 스타트업 대표 자택에 가압류 건 금융회사
- 홍콩 부동산 침체 가속화?… 호화 주택 내던지는 부자들
- 계열사가 “불매 운동하자”… 성과급에 분열된 현대차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