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자리 30%가 강남3구에…“우리는 여전히 강남 간다”[쏠림 사회 한국, 강남 리포트]
서울 직장인 29%가 강남3구에 일터
“모든 이벤트는 강남 중심으로 열려”
지난달 13일 오전 7시30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인근 빌딩에 자리 잡은 회의실. 이른 아침부터 20명가량 앉을 수 있는 공간이 가득 찼다. 캐주얼한 맨투맨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사람부터 ‘칼정장’에 서류가방을 든 사람까지, 차림도 나이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스타트업 민관 협력 기관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개최하는 ‘테헤란로 커피 클럽’ 풍경이다.
2주마다 열리는 커피 클럽의 이날 주제는 식음료 분야 로봇과 사물인터넷(IoT)의 만남이었다. 배달음식 묶음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라우드스톤’ 김민준 대표와 무인 커피 스테이션을 개발하는 ‘플랜즈커피’ 최준혁 대표가 연사로 나섰다. 대학 시절 창업 동아리에서 어떻게 아이템을 구상했는지부터 시작한 설명은 사업 단계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넘어 향후 성장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팀원들과의 의견 조율 과정, 코로나19 직격탄 극복기 등 생생한 경험담과 노하우가 나오자 참석자들도 분주해졌다. 노트북에 뭔가를 타이핑하거나 수첩에 메모하고,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휴대폰 카메라로 연신 찍었다.
다음 순서는 네트워킹이었다. 참석자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나눴다. “우리 회사 기술을 색다른 분야에 접목할 기회를 찾고 있다”는 개발자, “스타트업 업계 동향을 파악하고 싶다”는 변리사, “창업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서 왔다”는 대학생까지 진지한 표정이었다. 악수와 담소, 토론이 오가는 강남의 회의실에선 저마다의 포부와 야망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스타트업 성지 ‘마포·성수’ 떠오르지만… “여전히 강남이 답”
인구와 일자리의 서울 및 수도권 집중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강남으로 일자리가 쏠리는 현상은 갈수록 도드라진다. 현대·삼성 등 대기업 본사 이전을 계기로 ‘강남 시대 열린다’는 기대가 쏟아진 게 1990년대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며 수도권 내에서도 강남으로의 쏠림은 양적·질적으로 심화했다.
2021년 말 기준 서울에서 일하는 사람 10명 중 3명은 강남이 일터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전체 사업체 종사자 577만1226명 중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에서 일하는 사람이 169만176명(29.3%)에 달했다. 사업체 수를 봐도 강남3구는 총 25만6496개로 서울 전체의 20%가 넘었다. 20년 전 13만9300개와 비교해보면 두 배가량 늘었다. 강남구가 1위였고, 서초구·송파구도 상위 5위 안에 자리 잡았다.
이는 서울시 인구가 1000만명 아래로 내려간 사실과 대비하면 의미심장하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줄었는데, 일터로서 강남의 입지는 오히려 팽창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협력업체와 벤처캐피털까지 사실상 모든 업종이 강남에 몰린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간다”는 속담이 있지만, 지금은 “사람은 나면 서울로,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간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인공지능(AI) 문서 처리 회사를 창업해 운영 중인 임현규씨(30·가명)에게 가장 중요한 건 “회사의 접근성이 얼마나 좋은가”이다. 임씨는 4년 전 창업 직후 서울시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서초구 양재동에 사무실을 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역 인근으로 옮겼다.
“직원 중에 서울 사는 사람은 절반도 안 돼요. ‘빨간 버스’(수도권 광역버스)가 얼마나 자주 오는지,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건이죠. 그 조건을 충족하는 유일한 곳이 강남역이었고요. 강남에 있으면 판교 사람이나 수원 사람도 출근할 수 있지만, 판교에 있으면 서울 노원구나 인천 사람은 절대 못 오죠.”
1960년대 말부터 본격 시작된 강남 개발은 1970년대 이후 건물 취득세와 재산세, 등록세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에 힘입어 날개 돋친 듯 빠르게 진행됐다. 서울시청과 을지로, 광화문 등 도심 업무지구의 과밀을 해소하고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었다. 1980년대 후반 금융기관들이 밀집하며 빠르게 성장한 테헤란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엔 벤처와 정보기술(IT) 기업의 성지로 발돋움했다. 비슷한 시기 경기도 판교 신도시 개발로 테크노밸리가 생겨났고, IT기업들이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그럼에도 강남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판교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테헤란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성공의 기대감은 더 많은 스타트업이 이곳을 찾도록 했다. 대기업의 주력 업종이 제조업에서 정보통신기술(ICT)로 바뀌는 상황에서 정부가 테헤란로와 가까운 판교에 업무지구를 조성하자 강남권의 기업 집중이 오히려 심해졌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 회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가 발간한 ‘2022 서울 오피스 테넌트 프로파일’ 보고서를 보면 강남은 IT기업 비중이 전년 대비 4.6%포인트 늘며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쿠팡, 당근마켓, 마켓컬리 등도 이 권역에서 규모를 확장했다. 코로나19 때 잠깐 늘었던 상권 공실률은 최근 1%대로 내려가며 오피스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임씨는 “모든 이벤트는 강남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일할 때 항상 바빠서 분초 단위로 시간을 배분해 써요. 그런데 강남은 교통이 좋으니까 이 안에 있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거든요. 그리고 ‘강남 소재 기업’이라는 이미지도 굉장히 중요하고요.”
경기 안양에 있는 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변리사 이준영씨(가명)는 내년에 역삼역 근처에 사무소를 개업할 계획이다. “특허 분쟁이나 권리 측면에서 기업들이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하려면 당연히 많이 모여 있는 데로 가야죠. 강남은 미팅을 잡기에 수월하고, 동향을 알아보기도 편하니까요.”
최근엔 판교뿐 아니라 서울 마포, 성수 등이 스타트업 성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집적 효과를 기대하는 대부분은 “여전히 강남이 답”이라고 말한다. 인적자원 관리 기술 기업 원티드랩이 지난 1월 개발자 50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5.4%가 판교보다 강남을 선호하는 근무지로 꼽았다.
강남구에 있는 IT회사에서 근무했던 조상현씨(31·가명)는 “비슷한 업종이나 규모의 회사라도 다른 지역에 있다고 하면 평가가 달라지는 것 같다”면서 “구직자 입장에서는 ‘회사가 임대료 아끼겠다고 투자도 안 하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근무환경이 별로일 것 같아 매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왕복 10차선 대로를 따라 늘어선 높은 빌딩숲, 그 안에서 느껴지는 활력과 생동감. ‘이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 또는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사람들을 강남으로 계속 빨아들인다.
출근시간 전철 혼잡도 150%…“철창 안에 갇힌 닭 같아”
좁은 지역에 기업들이 밀집되면 각종 시너지 효과를 낸다. 빠른 정보 공유와 의견 교환, 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며 혁신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과도한 쏠림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낳는다. 기업과 사람들이 강남 지역에 쏠릴수록 비강남, 비수도권은 기업과 인구의 분포가 엷어진다. 이른바 ‘지방소멸’ 현상이다.
강남 초밀집은 그 자체로도 개인과 사회에 고통과 비용을 안긴다. 출퇴근길에 사람들이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포개지는 곳, 도로가 사실상 주차장이 되는 곳, 어디든 줄을 서고 기다려야 하는 곳, 밤낮없이 시끄럽고 혼잡한 곳, 비싼 곳. 도시의 성장과 함께 팽창하는 강남의 다른 얼굴이다.
경기 부천에서 강남구 역삼동으로 출근하는 보험설계사 김명훈씨(60·가명)의 매일 아침 일과는 휴대폰 지도 앱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선거리로 약 25㎞, 오전 9시에 도착하려면 7시30분에 출발해도 빠듯하다. 매일 아침 고민의 연속이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쭉 갈지, 훨씬 붐비지만 약간 빠른 9호선으로 환승할지, 이번 열차를 놓치면 다음 열차는 언제 탈 수 있을지…. 그는 휴대폰 앱을 계속 ‘새로고침’하며 플랫폼을 향해 달린다.
“당연히 회사와 집이 가까우면 좋겠죠. 하지만 회사 근처 집은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집 주변 일자리 중엔 마땅한 게 없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죠. 23년째 같은 집에서 같은 회사를 다니는데도 적응이 안 되네요. 매일 버거워요.”
김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시가 분석한 지난해 대중교통 이용 현황을 보면 가장 혼잡한 지하철역은 강남역으로 하루 평균 승차 건수가 7만1598건이었다. 하루 평균 대중교통 이용량은 944만건인데, 강남에 이어 잠실역(6만8635건), 홍대입구역(5만7426건) 등 다른 노선이나 버스로 갈아타기 쉬운 역사 순으로 하루 승차량이 많다. 강남 지역을 통과하는 지하철 4·7·9호선은 가장 붐비는 출근시간대(오전 8시~8시30분) 평균 혼잡도가 150%였다. 매일 수십만명이 일터로 향하며 ‘윈·윈’이 아닌 ‘루즈·루즈 게임’에 몸을 내맡긴다.
최서영씨(28·가명)는 강남구 삼성동의 로펌에서 비서로 일한다. 판교에서 다른 회사를 다니다가 일터를 옮긴 지 3년째다. “소개팅할 때 주선자가 상대방에게 저를 ‘삼성동 직장인’이라고 소개하더라고요. 보통 자신의 일터를 뭉뚱그려 말하는데 강남에선 삼성동, 역삼동 하면서 동 단위로 말하는 게 웃기고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상상하는 특별한 이미지가 있으니까요. 도시적인 느낌, 도도한 전문직 같은 느낌이랄까.”
최씨가 이 회사에 다니는 건 이미지가 주는 특별함보다는 경기 성남 분당에 있는 집에서 1시간 안에 출퇴근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광화문 쪽에도 로펌이 많은데, 도저히 거기까지 출퇴근할 엄두가 안 났어요. 지금도 ‘지옥철’에 끼어 있으면 철창 안에 갇힌 닭이 된 기분이에요. 사람들도 다 예민해지니까, 한 달에 한두 번은 싸우는 걸 봐요. ‘밀지 마세요’ ‘왜 쳐놓고 사과를 안 하세요’ 하면서.”
‘삼성동 직장인’ 같은 이미지는 기업에는 분명 큰 장점일 테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다. 최씨의 회사가 있는 코엑스 인근 지역은 오피스텔과 원룸 월세가 60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에 달한다. 전세 보증금은 최소 2억원이다. 하지만 3년차인 그의 연봉은 4000만원 초반대다. 야근수당을 합해도 월 300만원이 안 되는 수입으로는 비싼 동네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남들은 삼성동에서 일한다면 부러워해요. 돈도 잘 벌 것 같고 번지르르해 보이니까. 그런데 막상 일터로서 여기는 별로거든요. 점심 먹으면 최소 2만원인데 비싸기만 하고 맛은 없고,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항상 스트레스 받고요.”
30년째 배달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문정운씨(52·가명)는 강남을 “‘부자인 듯’하는 동네”라고 표현했다. “부자 동네가 아니고 부자인 듯하면서 돈을 버는 동네라고 생각해요. 음식 배달 자체가 직접 밥해 먹을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번쩍번쩍해 보이지만 여유 없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동네죠.”
서울시가 지난해 발표한 시민 생활 데이터를 보면 서울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강남구 역삼1동(1만6130가구)이었다. 회사 가까이 사는 40~50대 1인 가구가 주로 분포하는 이 지역의 월평균 배달서비스 접속 횟수는 17.6회. 이틀이 멀다 하고 음식 배달 앱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문씨 역시 ‘부자인 듯’하고 싶은 마음에 강남으로 왔다. “배달기사들 사이에서 옛날부터 강남은 ‘음식 불패’ ‘식당 불패’라고 했어요. 워낙 유동인구도, 식당도 많으니까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죠. 관악구에서도 일했는데, 그때랑 비교해보면 지금 수입이 1.5배는 되는 것 같아요.”
현재 관악구에 사는 그는 오는 12월부터는 아예 강남에 5~6평짜리 고시원을 구해 생활할 계획이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출퇴근길에 막히는 게 너무 아깝거든요. 그 시간에 콜 하나라도 더 받을 수 있는데. 몸이 좀 피곤하더라도 중심가에 있으면 그만큼 기회가 생기니까요.” 돈 버는 동네에서 그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주 5일, 하루 12시간씩 오토바이를 몬다. 그렇게 몸이 지칠 정도로 달리고 달려 각종 수수료를 제하고 떨어지는 게 월 300만원 남짓이다.
그럼에도 문씨는 강남을 ‘하는 만큼 벌 수 있는 곳’이라고 믿는다. 어차피 이곳을 벗어나면 이마저도 안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화려한 강남의 낮과 밤을 점점이 수놓으며 달린다. 더 많이 벌고 싶다, 더 성공해서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안고.
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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