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돈으로 사는 강남, 그럴수록 공공의 빈자리는 커진다[쏠림 사회 한국, 강남 리포트]
‘부자동네’ 이미지 뒤 옅어지는 공공성
비싼 임대료 부담에 혈세 수백억 투입
“강남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좋은 동네지만, 그 안에 제공되는 공공 서비스는 아주 취약합니다. 도시에서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것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만 이뤄져 있다면, 그게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울 강남·서초구 지역 이슈를 다루는 시민단체 ‘노동도시연대’의 남궁정 사무국장의 말이다. 강남은 ‘부자 동네’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강남 지역은 기업 본사들이 몰려 있고 부동산 가격이 높은데다 유동인구도 많아 상권이 발달한 덕에 재산세, 취득세 등 각종 세입이 풍부하다. 재정자립도가 서울 전체에서 1위(강남 58.9%), 2위(서초 57.8%)를 다툴 정도로 재정이 넉넉하다. 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쾌적한 편의 시설을 제공할 수 있는 배경이다. 청담역 지하에 조성한 ‘미세먼지 프리 존’이나 대치동 학원가 앞에 집 모양 가건물로 만든 ‘스트레스 프리 존’도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남궁 사무국장은 “강남·서초의 행정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이뤄지는 게 많다”면서 “의료, 교통, 일자리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서비스를 민간이 대신하고 있고, 돈 없는 사람은 공공 서비스 이용의 선택권과 폭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강남·서초라고 잘 사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주거취약 계층, 노인 빈곤 계층, 기초생활수급자 등이 당연히 있죠. 하지만 워낙 (땅값이) 비싼 동네니까 이들을 위한 공공시설을 둘 공간 자체가 부족해요. 대형병원이 밀집해 있지만 공공병원은 서초구 내곡동 어린이병원 하나뿐이고, 주거복지센터나 동주민센터, 어르신 일자리 센터 등의 시설은 도심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른바 ‘빅5’ 종합병원(아산·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성모) 중 네 곳이 강남3구에 있어 전국 각지는 물론 외국의 의료 수요까지 빨아들이고, 건물마다 성형외과, 피부과가 몇개씩 들어설 정도로 ‘의료천국’이지만 공공병원은 강남 3구를 통틀어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0년 된 건물 신축 이전을 위해 약 293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인 강남경찰서 압구정파출소 사례도 강남에서 공공 서비스를 제공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경찰서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은 파출소 건물인데도 책정 예산 중 땅값(건설보상비)만 280억원에 달한다. 비수도권 지역 파출소 이전에 많아야 10억원대의 예산이 들어가는 것과 비교하면 약 30배나 더 들어간다. 각종 재개발 이슈와 맞물려 있는 압구정의 비싼 땅값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
경찰 관계자는 “지하철 압구정역과 압구정로데오역 두 개가 포함된 지역을 관할하다 보니 매일 파출소에 접수되는 신고가 40~50건은 된다”면서 “치안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이 지역 안에 파출소를 다시 지어야 하는데, 땅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상업용 공간 임대료도 월등히 높다. 지난해 서울시 상가임대차 실태조사를 보면 강남역 상가 1㎡당 통상임대료는 14만3600원으로 서울 평균(6만9500원)의 2배가 넘었다. 통상임대료는 월세, 보증금 월세전환액, 공용관리비 등으로 구성되는데, 평균전용면적(58.7㎡, 17.8평)으로 환산하면 월 임대료가 약 840만원에 달한다. 압구정로데오역(10만3400원), 선릉역(10만1700원) 등도 1㎡당 월 임대료가 10만원을 넘었다.
이렇다보니 공공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확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존의 공공 서비스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강남구의회에 따르면 올해 기준 장애인교육센터, 복지재단, 도서관, 청소년심리상담센터 등 구에서 운영하는 각종 시설 32개에 투입된 임차 보증금이 83억원, 월세가 연 14억2900만원에 달했다. 과도한 밀집 탓에 공공 서비스 자체에 들어가야 할 예산이 터무니없이 높은 임대료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공공 시설이 도심 바깥으로 밀려나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온다. 2021년 말 폐소된 강남구 청소년 쉼터가 한 사례다. 수서동에 있었던 이 쉼터는 1998년 자치구가 만든 최초의 구립 청소년 쉼터로서 20여년 동안 3260명의 아이들이 거쳐갔지만, 기존 시설의 임대료 상승과 이전 후보 지역 주민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강남구 청소년 쉼터의 마지막 소장이었던 박건수씨는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2018년부터 3년 간 이곳에서 오갈곳 없는 아이들의 가족이 됐다. “가정 폭력 피해 아동은 갈 곳이 없어요. 쉼터는 그 아이들이 마음 편히 묵고, 안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다른 대안도 없이 임대료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시설을 없애버린 거죠.”
당시 강남구청은 전세 보증금 예산으로 9억원 가량을 책정했지만, 이 지역에서 적절한 공간을 확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박 전 소장은 “기존에 입주했던 건물 측의 사정으로 새로운 공간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예산을 증액해야 했다”면서 “하지만 구에서는 시설을 이용하는 청소년이 많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외면했다”고 했다. 그는 “학대 피해 아동이나 가출 청소년은 어느 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 위기 청소년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게 쉼터였고 강남구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상징성도 컸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중장년을 위한 일자리 센터인 ‘서초50플러스센터’도 비슷한 사정이다.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이 시설은 가장 가까운 지하철인 양재시민의숲역이나 양재역에서도 버스를 갈아타고 10~15분 정도 가야 한다. 건물 맞은편에 비닐하우스와 논밭이 보이는 곳이다. 센터 관계자는 “외곽에 있다 보니 도심에서 못하는 캠핑 같은 프로그램을 주로 운영하면서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면서도 “기본적으로 교통이 불편한 데다 어르신 문화여가복합시설인 내곡느티나무쉼터도 바로 옆에 있어 항상 주차 공간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남궁 사무국장은 “강남은 워낙 민간 상업시설이 많고 비싸다 보니 공공 시설을 지을 만한 공간 자체가 없다”면서 “공간이 생기면 모든 시설을 한꺼번에 몰아넣으면서 비효율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강남은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편리하고 좋은 곳이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에겐 살아가기 힘든 곳입니다. 사회 필수 시설을 돈이 된다, 안 된다는 시장 논리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을까요?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서비스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제공되는 공간, 그게 지속가능한 도시 아닐까요?”
김정화 기자 cl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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