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를 들고만 있는 채로 늙어가는 사람처럼" 시를 쓴다는 건 [책과 세상]

진달래 2023. 10. 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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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촉진하는 밤' 출간한 김소연 시인
인간에 대한 그리움 절감한 팬데믹 큰 영향
"방황하는 태도"로 시를 쓴 30년의 시간
"이전 작업보다 시를 짙게 쓰는 일은 노역
…죽을 만큼 쓰지 말자고 생각하게 돼"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달 말 한국일보사에서 신작 시집 '촉진하는 밤'을 낸 김소연 시인과 인터뷰했다. 1993년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극에 달하다'(1996) 이후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산문집 '어금니 빼기' ‘마음 사전’ 등을 냈다. 지난해에는 산문집 '한 글자 사전'이 '일본번역대상'을 수상했다. 김예원 인턴기자

"두려움이 없어지면 참 좋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없어질 만큼 편안해지는 것도 두려워요. 어떤 진실은 봉인해 놓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뚜껑을 확 여는 느낌이 아니라 (진실이 담긴) 접시를 들고만 있는 채로 늙어가는, 그렇게 방황하는 게 제가 시를 쓰게 하는 태도인 것 같아요."

김소연(56)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촉진하는 밤'을 냈다. 김 시인은 첫 시집 '극에 달하다'(1996) 이후 5, 6년에 한 번꼴로 시집을 출간해왔다. 최근 한국일보사에서 그와 만나 대화를 하면서 띄엄띄엄 시집을 내는 그 천천한 속도의 이유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 시인은 "싫어하면서도 좋아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시쓰기와 시쓰기를 가르치는 일, 그리고 종종 실망을 안기는 이런 세상에 대해서도. 그는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 그렇다"고 한다. 소중함에서 피어나는 두려움은 그를 추동한다. 다만 두렵기에 과속할 수 없고, 섣부르지 않게 자기만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진실의 부재를 발견하기 위하여. 부재를 부재로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구의 손쉬움을 거부하기 위하여. 오직 두려움을 위하여. 두려움이 없는 두려움을 두려워하며." ('내가 시인이라면')

수록시 48편 대부분이 팬데믹 시기에 쓰였다. 그러다 보니 인간 자체에 대한 그리움,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 연결되고 싶은 바람 등이 시집 전체를 지탱한다. 김 시인은 "독일 베를린에 방문했을 때 10·29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듣고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혼란을 느꼈는데, 팬데믹 시기 전체가 그런 시간들이었다"고 돌아봤다. "곁에 있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친한 사람이 아니라 막연한 어떤 인물이나 나에게서 먼 곳까지 내 팔은 짧아서 못 가지만 나의 정념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시에 담고 싶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촉진하는 밤·김소연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176쪽·1만2,000원

시집 전반에는 밤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암흑으로 비유되는 팬데믹 영향도 받았지만 보다 복합적인 밤의 면모에 집중했다. 단절이자 해방, 포근한 질감까지. 수록시 '비좁은 밤' '푸른 얼음' 등이 일종의 밤 시리즈에 속한다.

"……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 우리는 태어난 것 같다 // 어제와 오늘 / 사이에 유격이 클 때 /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 참 좋구나 // 우리의 /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 이 드넓은 햇빛이 / 말없이 한없이 / 북돋는다"

표제작 '촉진하는 밤'도 같은 결이다. 이는 누군가를 간호하는 긴 밤의 상념이 모여 시간을 끌고 나아가는 동안 완성된 시다. 시인은 그날을 "희한한 날"이라고 회상했다.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도 시간이 한없이 더디게 가는데, 그 공간 속에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며 "시간에 대한 감각이 새롭게 생성됐다"고 말했다. 지구에서 바라본 천체를 쪼개 만든 공간으로서 시간을 감각하면서 천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는 것. 그때 떠오른 '촉진하는 밤'을 제목에 걸고 시를 써 내려갔다. 제목 속 '촉진하다'에는 '다그쳐 빨리 나아가게 하다(促進)'와 '환자의 몸을 손으로 만져서 진단하다(觸診)'는 의미가 공존한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시어와 시의 사이 얇은 틈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김소연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남은 이야기가 많아 이렇게 허술하게 시집을 내도 되나 생각했다"면서 "인간, 생명체뿐만 아니라 장소 등 어떤 존재도 수신자와 발신자가 될 수 있는데 그런 상상으로 이야기를 더 채워나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섣부른 예상일 수 있으나) 어쩌면 그의 일곱 번째 시집을 비교적 금방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예원 인턴기자

1993년 등단한 김 시인은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아무 느낌도 없다. 미련 맞은 일"이라는 소감과 함께 그는 웃어 보였다. 그럼에도 시간의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한 시들이 유독 '토닥토닥'하는 듯한 이번 시집의 특색은 시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쓰기가 필연적으로 시인에게는 위로"라고 담백하게 답했다.) '며칠 후' '접시에 누운 사람' '내가 존경했던 이들의 생몰 기록을 들추어 본다' 같은 시들은 일상을 사는 생활인들, 시간을 깊이 감각하기 쉽지 않은 "벼랑 끝에서 황금빛 테두리에 갇혀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시집 뒤표지 글)을 위무한다.

변화도 있다. 시인은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 때만 해도 나의 슬픔보다 내가 접촉했던 타자의 슬픔을 내가 공감하면서 쓴 시들이 많아서 나는 힘들면 안 된다는, 패기 같은 것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의 내 작업들보다 점점 더 시를 짙게 쓴다는 건 노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죽을 만큼 쓰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했다"고 전했다. 두려움을 견디며 내면으로 파고들어 캐낸 시어들. 시인의 고됨을 독자가 위로로 삼을 때 그는 되레 기뻐할지 모른다. 그래서 정말 죽을 만큼 쓰지는 않길 바라게 된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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