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 읽을 권리”냐 “자녀 보호”냐… 美 ‘금서 전쟁’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3. 10. 7.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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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禁書 주간’ 맞아 다시 뜨거운 논쟁
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공립도서관 외벽 양쪽에 ‘Books for All(모두를 위한 책)’ ‘Protect the Freedom to Read(독서의 자유를 보장하라)’라는 글귀가 담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근 미국 보수·진보 진영의 금서(禁書) 요청·지정이 첨예한 문화 전쟁으로 떠오르며 갈등이 확대되는 양상이다. /윤주헌 특파원

미국 뉴욕 최대 도서관인 뉴욕공립도서관 외벽 양쪽엔 5일(현지 시각) 현재 보라색 대형 현수막 두 개가 걸려 있었다. 현수막 한쪽에는 ‘Books for All(모두를 위한 책)’, 다른 한쪽에는 ‘Protect the Freedom to Read(독서의 자유를 보장하라)’라는 글귀가 적혔다. 도서관 앞, 상징물인 사자 동상 ‘인내’와 ‘투지’ 앞에 놓인 모형 책에도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길 건너에 있는 별관 건물로 들어서자 빨간 원형에 대각선 선이 그어진 ‘금지’ 표시와 함께 책들이 놓여 있었다. 도서관 관계자는 “내용에 문제가 있으니 금서로 지정하자는 지목을 최근 들어 자주 받는 책들”이라면서 “우리는 책에 대한 검열 시도에 반대한다는 의지를 담아 이 도서들을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 지성의 다양성을 사회 정체성으로 내세워온 미국에서 ‘금서(禁書·금지된 책) 전쟁’이 점점 격해지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이념 양극화가 심해지고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주의’ 등을 둘러싼 보수·진보 간 대립이 심화하면서 금서 요청·지정이 첨예한 정치 이슈로 굳어지는 상황이다. 책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문화 전쟁은 1982년부터 전미도서관협회(ALC)가 9월 말 혹은 10월 초에 열어온 ‘금서 주간(Banned Books Week)’을 맞아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금서 주간’은 자유롭고 투명한 정보의 유통을 위해 공공도서관이나 학교 등에서 ‘금서를 금지하자’는 캠페인이다. 올해는 10월 1~7일 미 전역에서 열리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금서가 정치적으로 첨예한 이슈가 되다 보니, ‘금서 주간’에 대해 지역마다 상반된 반응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진보 성향 도시인 뉴욕의 경우 에릭 애덤스 시장이 지난 3일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책 검열에 함께 단호히 맞서자”면서 힘을 실었다. 뉴욕공립도서관도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올릴 때 ‘#FreedomToRead(읽을 자유)’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금서와의 전쟁’에 연대한다는 사실을 보여달라고 시민에게 호소하고 있다.

반면 보수 강세 지역에선 이 캠페인 자체가 공격당하는 상황이다. 플로리다·텍사스주 등에선 과도한 PC주의에 반발하는 기류가 강해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거나 흑인을 중심으로 미 역사를 서술하는 책 등을 대거 학교와 도서관에서 빼고 있는데, 무엇이 잘못이냐는 것이다.

보수 성향이 강한 캔자스주의 경우 한 도서관이 ‘독서의 자유’를 주제로 한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하려 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다수의 도서관 이용자들이 온라인 댓글 등으로 욕설을 퍼붓고 “도서관 책을 없애버리겠다”는 협박 글을 홈페이지 등에 올렸다. 이 도서관은 결국 캠페인을 취소하고 온라인에서 관련 내용을 모두 지웠다. 역시 보수 강세인 플로리다주 리언카운티의 프리실라 웨스트 의장은 최근 성명을 내고 “독서를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것”이라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적당한 시기에 맞춰, 적당한 주제의 책을 알게 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ALC에 따르면 지난해 미 50주(州) 중 특정 도서에 대한 금서 지정 요청이 가장 많았던 주는 텍사스로, 2349권에 대한 금지 요청이 있었다. 반면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주에선 검열 요청이 없었다.

ALC는 지난 20년간 금서 지정 요청은 매해 증가해 왔고 지난해 특히 많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학교·공공도서관 등에 특정 책을 금서로 규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도서 수는 지난해 2571권으로 2021년(1858권)에 비해 38% 급증했다. 금서 요청을 한 주체 중 부모가 30%로 가장 많았고 (부모 외) 보호자 28%, 정치·종교 집단(17%) 등이 뒤를 이었다. 금서 요청이 들어오면 보통 학교·도서관 이사회 등이 책을 서가에서 뺄지를 개별적으로 결정한다. 지난해 ‘책 전쟁’의 가장 첨예한 ‘전선(戰線)’은 성소수자 이슈였다. 금서 요청 10위에 오른 책 13권(4권이 공동 10위) 중 7권이 성소수자를 다룬 책이었다. 1위는 성소수자의 회고록 ‘젠더퀴어’였다.

금서 순위의 변천사를 보면 시대상의 변화가 드러난다. 캠페인이 시작된 1982년 금서 요청 1위 도서는 여성의 건강과 신체 등을 다룬 페미니즘 책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이었다. 여성 인권 신장을 껄끄러워하는 시대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2001~2002년엔 ‘해리 포터’가 2년 연속 1위였다. 이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와 테마파크까지 만들어지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출간 초기엔 악마적 주술에 관한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다.

성소수자·주술 등이 보수층 인사들을 불편하게 했다면, 진보 진영은 인종 차별적 내용을 다룬 책을 공격해 금서 목록 상위권에 올렸다. 한때 미국의 고전이자 청소년 필독서로 여겨져 온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검둥이(nigger)’ 같은 인종차별적 단어가 많다는 이유로 출간된 지 49년 만인 2009년 금서 순위 4위에 올랐다. 인기를 바탕으로 넷플릭스나 영화·드라마 등으로 제작된 ‘루머의 루머의 루머’나 ‘헝거 게임’ ‘가십걸’ 등도 자살 같은 부적절한 소재, 폭력성 등으로 금서 목록 상위권에 올랐다.

4일(현지 시각) 찾은 뉴욕 공립 도서관 로비에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은 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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