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대법원장 공백… 극한 정쟁에 사법부도 파행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동의안이 6일 국회에서 부결됐다. 사법부 수장 임명 동의안 부결은 35년 만의 ‘사건’이지만 이미 예상했다는듯 여당에서 큰 소리로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켰다. 국회 관계자는 “여야 대결의 정치가 고착되다 보니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돼버렸다”고 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 인준 과정에서 낙마한 것은 1988년 정기승 후보자 부결 이후 처음이다. 입법·행정부에 이어 사법부까지 거대 야당 앞에 파행이 불가피하게 됐다. 민주당은 더 나아가 노란봉투법(노조법2·3조)과 방송법 개정을 연내 밀어붙이기로 했고, 대통령실은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반대로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는 핵심 입법들은 야당이 막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한 정쟁과 대선 연장전은 내년 4월 총선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국가 기능 마비가 우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동의안은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295명 중 찬성 118표, 반대 175표, 기권 2표로 부결됐다. 지난달 김명수 전 대법원장 퇴임에 이어 후임 인준이 부결되면서 사법부 수장 공백 사태로 인한 대법원의 운영 파행이 불가피해졌다. .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헌법 기관인 법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그동안 여야 간 정치적 합의가 깨진 것”이라며 “(야당이) 국민의 권리를 인질로 잡고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균용 후보자는 부결 직후 “빨리 훌륭한 분이 오셔서 사법부가 안정을 찾는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고 당론으로 이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해 반대 투표하기로 했다.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고위 공직자로서 직무 수행 능력과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다. 비공개 의총에서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당론 부결을 제안했고, 참석 의원 전원 의견으로 찬성했다고 한다.
부결 직후 국민의힘 의원들은 본회의장 밖에 나와 규탄 대회를 열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재명의 개인적 사법 리스크 방탄을 위한 의회 테러 수준의 폭거”라고 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도 “민주당이 법을 마지막 보루로 믿는 국민의 절박함을 외면했다”고 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임명된 법관 교체를 지연시켜 내년 총선까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추가 구속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투표 전부터 여당 내에서도 부결을 기정사실화하는 전망이 많았다. 여야 대립 속에서 민주당과 주고받기식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여당은 ‘사법 공백 야기시킨 민주당은 사죄하라’라는 플래카드를 준비했다가 부결 직후 꺼내들었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대법원장 임명 지연으로 국민이 피해를 본다고 하지만 여당이 이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대법원장 임명 부결 사태는 여소야대 상황의 대결 정치, 보복 정치의 결과물이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핵심 국정 과제는 번번이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우주항공청 설치가 대표적 사례다.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은 조직의 규모, 성격을 둘러싼 야당의 반대로 여전히 국회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작년 5월 윤 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 229건(예산안 부수 법안 제외) 가운데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29건(13%)에 불과하다. 다른 법안에 내용이 반영된 후 폐기된 것을 포함해도 국회가 처리한 정부안은 55건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선 같은 기간 국회가 101건을 처리했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간호법 등 야당 지지층에게 호소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밀어붙였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예고한 상태에서 법안을 수정해야 한다는 여당과 원안을 주장한 야당이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서 두 법안 모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다. ‘거야의 일방 처리→대통령 거부권’의 악순환 속에 야당이 애초에 ‘법안의 수혜자’라고 이야기했던 농민, 간호사들조차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했다.
민주당은 지난 7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전원 일치 기각된 이후, 지난달 한덕수 국무총리 해임 건의안을 강행 처리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탄핵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야권 원로인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대법원장 후보자로 흠 있는 사람을 추천한 것은 문제지만, 사법부 독립과 자존을 위해서라도 이런 사태는 다시는 빚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민주당이 그동안 총리 해임 건의안과 검사 탄핵안을 통과시킨 것을 보면 대법원장 부결 역시 그 연장선에서 정치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라며 “총선 때까지 여야 모두 강경 태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고, 민생보다는 극한 정쟁에 몰두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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