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최인호 10주기… 당신도 ‘평생 현역’
80대에도 현역인 외과 의사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우리는 ‘평생 현역’
추석 직전 소설가 최인호(1945~2013)의 10주기 추모 행사를 찾았다. 열흘 뒤인 10월 17일은 그의 생일이고, 열흘 남짓 전인 9월 25일이 기일(忌日)이었다. 생전의 작가와 얼마간 인연이 있다. 문학 담당이던 초년 시절부터 그의 쾌활함을 좋아했지만, 세상 등지고 침샘암과 사투 벌이던 말년의 작가도 존경했다. 이 암은 사람의 정상적인 목소리를 빼앗는 몹쓸 병. 시종 탁하고 갈라진 음성으로, 죽기 전 이런 인터뷰를 했다.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손발톱이 빠졌지만, 고무 골무 끼운 채 연필 눌러 쓰며 새 장편을 끝냈다고. 그는 ‘평생 현역’이었다.
작가가 졸업한 옛 서울고 자리, 새문안로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추모식은 ‘최인호 청년문화상’ 시상식을 겸했다. 초대 수상자는 소설가 김애란. 한 세대 후배이긴 하지만, ‘청년’이란 호칭은 조금 민망할 불혹(不惑) 넘은 나이다. 김애란 역시 최인호를 떠올리면 ‘평생 현역’이란 말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한다는 것. 분야는 다르지만, 얼마 전 집 근처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토요일 정오 무렵 찾았던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건물의 정형외과. ‘A고 9회 동기생 일동 기증’이라고 쓰여 있는 오래된 대형 거울이 2층 접수실에서 먼저 환자를 맞는다. 그 학교 연혁으로 추산하니 의사 나이는 80대 후반.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3층 물리치료실에 누웠는데, 조금 전까지 2층 원장실에 있던 ‘의사 할아버지’가 말 그대로 비호처럼 계단을 뛰어오른다. “아직 마감 아니지? 한 명만 더 부탁해요!” 역시 할머니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경륜의 간호사들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단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다. 예술가나 의사가 아니더라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현역의 시간은 연장되고 있다. 올해 한국의 중위 연령은 45.6세. 국민 모두 나이순으로 줄 세웠을 때, 가운데 사람이 45세를 돌파했다는 의미다. 사회가 어른 대접을 해 주는 중위 연령은 1998년만 해도 30.7세였다. 그런 세상이니 앞서 김애란의 ‘청년’도 여전히 유효하달까. 이뿐만 아니다. 질병이나 장애 없이 지낼 수 있는 나이, 건강 수명도 늘어났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최신 통계인 2019년 한국인의 건강 수명은 73세다. 추세대로라면 올해는 75세를 넘을 것이다.
모두가 우려하는 저출생의 시대. 아이를 더 낳자고 외치고, 이민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또 하나 생각을 바꿨으면 하는 게 있다. 은퇴 연령과 노인 노동이다. 병원 접수실에서 프랜차이즈 맥도널드까지 6070 현역은 드물지 않다. 전성기처럼 빛나는 일은 어렵더라도, ‘평생 현역’은 점점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최인호 청년문화상’에 축사를 하러 온 또 한 명의 ‘평생 현역’이 있었다. ‘연개소문’ ‘대조영’을 쓴 84세의 작가 유현종이다. 그는 젊은 시절 꽤 희극적인 장소에서 후배 최인호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세운상가 한 빈터에서 주말마다 열린 원숭이쇼. 약장수 영감이 애지중지하던 녀석의 이름은 ‘명철’이었다. 이 녀석이 재주를 부려야 관객이 모여들고 박수를 치고 그래야 만병통치약을 팔 수 있는데, 명철이는 그 비싸디 비싼 바나나만 먹고 딴전만 피우더라는 것. 애가 탄 영감은 간절한 목소리로 원숭이를 불렀다. “명철아 왜 이러니, 응, 어서 일어나, 잘해보자 명철아! 제발.” 그 목소리와 표정이 잊히지 않아 종종 세운상가를 찾았는데, 똑같은 이유로 그곳을 찾는 후배가 최인호였다는 것이다. 둘은 창작의 불꽃이 시들 때마다 주말의 세운상가를 찾았다고 했다.
‘평생 현역’을 살아야 할 많은 선배와 우리 세대에게 함께 외친다. “명철아, 어서 일어나, 건강하게 잘해보자 명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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