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잔인한 도시 샌프란시스코
타지살이는 놀라움의 연속이라지만 지난 추석 연휴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 화장실에서 겪은 일보다 심장을 벌렁거리게 한 일은 없었다. 손을 씻으며 거울을 봤는데, 기자 뒤로 건장한 남자가 화장실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게 아닌가. 한 명도 아니고 셋이나! “맙소사, 내가 남자 화장실에 잘못 들어왔구나.”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에 벌게진 얼굴로 허둥지둥 화장실을 박차고 나오니, 그제야 입구에 써있는 커다란 ‘All(모두)’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성별과 무관하게 모두가 함께 쓰는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것이다.
개성과 다양성을 신성시하는 미국에서도 샌프란시스코는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로 꼽힌다.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고, 성소수자와 대마초에 관대하다. 전위(前衛)적인 것이라면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게 이곳의 기본 문화다. 지난 2019년 샌프란시스코는 공항 1터미널을 미국 최초의 성소수자 시의원인 하비 밀크의 이름을 따 리모델링을 했는데, 기자가 사용했던 성중립 화장실도 그때 지어졌다. 5200개가 넘는 미국 공항 중에서 최초의 사례였다.
문제는 파격과 진보 뒤에 있는 ‘전위의 강요’다. 이념을 과도하게 강요하면 필연적으로 촌극이 벌어진다. 샌프란시스코는 지난 2016년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에 층마다 최소 하나의 성중립 화장실을 구축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소수·성전환자의 화장실 사용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결과 일부 ‘배려 깊은’ 성중립 화장실에선 ‘혹 다른 성별과 섞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화살표 방향으로만 진행하세요’와 같은 안내문이 붙기도 한다. 성중립 화장실 안에서 남녀 구역을 나눠 이용자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이념을 지키려 행해지는 비효율이 주는 불편도 크다. 성범죄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최근 현지 도심 대부분 건물의 성중립 화장실들은 널찍한 ‘1인용’으로 지어진다. 대신 한 건물에 이처럼 공간을 남용하는 1인용 화장실은 몇 칸 들어서지 못한다. 실제로 최근 방문한 구글의 신축 건물에는 복도 양옆으로 1인용 성중립 화장실이 총 6칸 지어져 있었다. 다수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은 아예 없었다. 구글에 다니는 지인은 “평일 화장실에 줄 서는 게 고역”이라고 했다.
이곳 주민들은 코로나 이후 범죄·마약 소굴로 전락해 도시의 기능을 잃어가는 샌프란시스코를 겪으며 “진보적 이념을 위해 이성, 상식, 효율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게 지긋지긋해졌다”고 말한다. 지난 6월 미국 유력 시사 주간지 더 애틀랜틱 역시 “샌프란시스코는 잔인한 도시가 됐다”며 “교조적인 진보로 정치의 순수성을 고집하며 (그에 따른) 파괴적인 결과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여론 변화에 지난 59년 동안 민주당 텃밭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이례적으로 좌우가 부딪치는 정치 격전지가 되고 있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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