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하루키가 좋아서
추석 연휴, 도쿄 와세다대학의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를 찾았습니다. 하루키가 기증한 책과 음반 등을 바탕으로 설립된 곳이죠. 라이브러리 담당자가 건넨 명함에 ‘権慧’라 적혀 있었습니다. ‘権慧’의 일본어 발음은 ‘겐에’이지만, 명함 뒷면 영문 표기는 ‘QUAN Hui(추안 후이)’라는 중국식.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할아버지께서 1926년 경북 안동에서 만주로 이주하셨어요.” 권혜(37) 박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합니다. 하얼빈에서 태어나 칭다오에서 자랐다는 권 박사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으로 유학 왔답니다. 부모님이 바빠 조부모 손에서 컸다는 그의 한국어에서 경상도 억양이 묻어납니다.
중국의 ‘안동 권씨’ 소녀를 일본 유학 가도록 추동한 힘은 바로 하루키. 고1 때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하루키가 그려내는 ‘고독’에 반했고, 도쿄대에서 ‘동아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번역과 수용’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20년 봄 와세다 대학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조교로 임용되면서 이른바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었어요. 일본 대학의 ‘조교’는 우리의 조교수와 유사한 지위. 학생들에게 중국 문화론과 전후 일본 문학을 가르칩니다.
중국에서도 하루키가 인기 있을까, 싶었지만 한국 다음으로 하루키 작품이 많이 번역된 곳이 중국이라는군요. 한·중·일 관계란 외교적으로는 복잡하지만 문학의 세계에선 단지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 권혜 박사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하루키는 올해도 노벨문학상을 놓쳤지만 뭐, 어떻습니까. 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후세에 남는 것은 작품이지 상이 아닙니다. (…) 한 편의 작품이 진실로 뛰어나다면 합당한 시간의 시련을 거쳐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 작품을 기억에 담아둡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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