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중세는 오감으로 욕망 실현한 감각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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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섬 한복판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들꽃 향기를 맡고, 유니콘의 뿔을 쓰다듬고, 거울을 갖고 노는 모습이 수놓아졌다.
프랑스 파리 클뤼니박물관이 소장한 중세 태피스트리(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연작이다.
중세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태피스트리 연작이 보여주듯 중세는 감각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참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머리를 관리하는 일은 중세 성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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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정의 근원이었던 심장
‘몸’을 둘러싼 중세의 사회문화사
◇중세 시대의 몸/잭 하트넬 지음·장성주 옮김/456쪽·3만2000원·시공아트
무감각, 무표정, 무욕…. 흔히 ‘서양 중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미술사 강사인 저자는 이 같은 시각에 반기를 든다. 중세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태피스트리 연작이 보여주듯 중세는 감각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눈, 코, 입을 비롯한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머리, 뼈, 심장, 손, 발 등 우리 몸을 둘러싼 중세 서구의 정치·사회·문화·예술사를 분석했다.
그중에서도 머리는 “중세의 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고 저자는 본다. 참수당한 성자의 머리는 신앙 그 자체이자 가장 확실한 교회의 재원(財源)이었던 것. 성자의 머리뼈를 확보한 교회엔 부유한 신자들이 각지에서 몰려와 헌금을 했다. 이 때문에 중세 유럽에선 순교자 세례 요한의 온전한 머리뼈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참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머리를 관리하는 일은 중세 성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순교자의 유해를 손에 넣을 형편이 안 되는 교회들은 중세 장인의 기술을 빌려 참수당한 머리를 연상하게 하는 모형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유럽 북부에선 성인 머리뼈를 상징하는 조각물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할 정도였다.
심장은 중세인에게 감정의 산실이었다. 1180년대 프랑스 시인 지로 드 보르넬은 한 사랑 시에서 “사랑은 그렇게 눈을 통해 심장을 얻네/눈은 심장의 정찰병이라서/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찾기 때문이지/심장이 품고 기뻐할 만한 것을”이라고 썼다. 이 시는 중세인이 눈을 통해 사랑의 대상을 찾고, 심장으로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신을 향한 사랑도 심장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뾰족한 창에 찔린 심장을 묘사한 그림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뜻했다. 심장이 감정기관이라는 중세인의 인식은 오늘날 언어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용기(courage)’는 심장을 뜻하는 옛 프랑스어 ‘coeur’, ‘우호적(cordi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심장을 뜻하는 ‘cordis’에서 비롯됐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저자는 “중세인에게 인체는 감각을 이용해 주위 세계와 접촉하는 매개체였고, 성(性)과 종교라는 상이한 정체성들이 불협화음을 빚는 무대였으며, 추악함과 고통부터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까지 여러 미학적 관념을 표현하는 화폭이기도 했다”고 썼다. 비단 중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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