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도 독립도 싫다” 현상 유지 원하는 민심에 승자 안갯속 [글로벌 포커스]
2000년 이래 대만 정권은 친중(親中) 성향 국민당과 반중(反中) 성향 민진당이 양분해 왔다. 2016년 집권한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에 나서면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는 냉각 상태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0월 3연임을 확정하며 “(대만) 통일을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밝히자 미국 군부와 정치권 등에서는 3연임이 끝나는 2027년 이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가설이 속속 제기됐다. 대만해협 긴장이 고조돼 내년 총통 선거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미중 관계 균형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당장 미국과 중국은 각각 내년 대선과 경제 회복이라는 국내 과제가 시급해 대만해협 긴장 수위를 높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대만 유권자들은 대(對)중국 안보 균형을 지속하면서 경제 발전을 누리는 현재 상태 유지를 원한다. 주요 정당 총통 후보들은 자신이 ‘현상 유지 적임자’라며 유권자 마음을 노리고 있다.
● 최대 현안은 야권 후보 단일화
내년 1월 13일 승부를 가릴 총통 선거는 7일 현재 집권 민진당 후보 라이칭더(賴淸德·64·부총통)와 제1야당 국민당 후보 허우유이(侯友宜·66·신베이 시장), 제2야당 민중당 후보 커원저(柯文哲·64·당 대표)의 3파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1강(强) 2중(中)’ 양상이다.
대만 매체 마이포모사의 지난달 20∼21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율 1위는 37.3%로 30%대를 굳건히 지키는 민진당 라이 후보다. 2위는 19.7%의 국민당 허우 후보로 올 5월 10%대로 추락한 이후 20% 선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다. 민중당 커 후보는 16.9%로 3위에 올랐다.
변수는 야권 후보 단일화다. 대만 언론은 이달 중 단일화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 들어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커 후보는 5일(현지 시간) 샌프란시스코 대만인 단체를 만난 자리에서 “대만에 이익이 되는 한 사람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허우 후보와의 단일화 의향을 거듭 내비쳤다. 이날 주리룬(朱立倫) 국민당 주석도 “단결된 마음으로 일치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단일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허우 후보와 커 후보 간 단일화가 어떻게 이뤄질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국민당과 민중당은 단일화 방식, 단일화 이후 양당 통합 여부, 당선 이후 정부 구성 방안 등을 놓고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당세(黨勢)로 볼 때 허우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원내 의석 수로 볼 때 국민당은 38석인 반면 2019년 창당한 신생 정당 민중당은 5석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허우 후보로 단일화하고 커 후보가 러닝메이트(부총통 후보)가 되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 후보와 허우 후보의 일대일 대결이 성사될 경우 지지율 격차는 많이 좁혀진다. 마이포모사 여론조사 결과 라이 후보 43.4%, 허우 후보 41.8%로 오차범위 안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 ‘차이 총통 계승자’ 라이칭더
“중국과 적(敵)이 되고 싶지 않다.”
라이 후보는 올 8월 미국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대등한 방식인 한 우리 문은 열려 있다. 평화와 번영을 발전시키고자 중국과 협력할 의향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만 독립보다는 양안 관계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민진당 온건파로 분류되는 차이잉원 총통 기조 그대로다. 라이 후보는 자신과 차이 총통의 관계를 미국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관계에 비교하면서 자신이 차이 총통의 계승자라고 호소한다.
라이 후보는 당 안팎에서 ‘독립 분자’라고 공격당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 강경파 출신으로 2017년까지 스스로를 “대만 독립을 위한 실무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대만 유권자 여론이 양안 관계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는 데다 국민당과 중국이 “라이칭더가 총통이 되면 대만해협 긴장 수위가 고조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위험 인물’로 몰아가자 노선을 변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이 후보는 “대만은 이미 주권 독립국가”라며 “별도로 독립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59년 신베이(新北)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라이 후보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의대를 졸업해 의사로 일하다 1994년 제3차 대만해협 위기 이후 정계에 입문했다. 민진당 세력 기반인 타이난(臺南)에서 시의원으로 3선을 한 뒤 2010∼2017년 타이난 시장을 지냈다. 2019년 민진당 총통 후보 경선에서 차이 총통에게 패배한 후 러닝메이트가 돼 2020년 부총통이 됐다.
● 중국과 인연 없는 허우유이
허우 후보는 국민당 색채가 옅은 인물로 꼽힌다. 국민당 후보 경선에서 그에게 패한 궈타이밍(郭臺銘·73) 폭스콘 창업자가 중국 남부 최대 도시 선전(深圳)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친중파인 반면 허우 후보는 중국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국민당이 유권자 중도층 공략을 위해 전략적으로 그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1957년 태어난 허우 후보는 한국 경찰대와 비슷한 중앙경찰대를 졸업하고 2006년 최연소 경찰국장(한국의 경찰청장)에 임명되는 등 2008년까지 경찰로 일했다. 2010년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2018년 신베이 시장에 당선돼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허우 후보는 지난달 13∼22일 미국을 방문했다. 시장 이력 외에 이렇다 할 정계 경험이 없는 그는 특히 외교안보 분야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의 싱크탱크와 대만인 단체들을 연이어 만나 자신의 외교안보관을 설명한 것이다. 국민당 총통 후보가 이처럼 오래 미국에 체류하는 일이 이례적이지는 않다. 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는 대만이다 보니 유권자도 미국이 인정하는 혹은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후보를 총통으로 선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허우 후보는 방미 기간 미국과의 경제 협력도 강화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지난달 19일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FA) 기고에서 그는 “미국 정부가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고 우호적인 법안을 만든 것에 감사하다”며 “미국의 프렌드쇼어링(동맹국 공급망 연대) 정책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반도체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우방국에 생산시설 및 연구개발 관련 투자를 하겠다”고 말했다.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중시해 온 국민당에 대해 대만 안팎에서 나오는 ‘중국 밀착’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포석이다.
● “미중 관계도 실용적으로” 커원저
대만의 미중 관계에 대해 실용성을 강조하는 커 후보는 민진당과 국민당 대안으로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유권자와 길거리에 앉아 대화하는 소탈한 모습도 자주 보여 준다.
올 4월 3주간 미국을 방문한 커 후보는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강연에서 “민중당은 전통적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 대만인을 위해 실용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정책을 펴겠다”면서 대외 정책 기조로 ‘역동적 균형’을 제시했다. 미중 사이에서 입장을 정해 두지 않고 현안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겠다는 것이다.
라이 후보와 마찬가지로 의사(외과) 출신인 커 후보는 2014년 타이베이(臺北) 시장 선거에 출마해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2019년에 자신이 창당한 민중당이 이듬해 총선에서 5석을 차지하며 제2야당으로 올라섰다.
그는 총통 후보 중 유일하게 바이든 행정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위 관계자와 만나 “대만 국방력 강화를 원한다. 미국이 대만의 역내 경제협력체 가입에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미국에 마냥 밀착하겠다는 것만은 아니다. 미중 반도체 공급망 갈등이 격화된 이후 세계 최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TSMC가 미국과 일본에 공장 건설을 발표하자 그는 “(공장) 부지 선정 기준은 정치가 아닌 시장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 국민 3명 중 1명 “영원히 현상 유지”
대만 유권자 사이에서는 ‘불통불독(不統不獨)’ 정서가 퍼져 있다. 독립도 통일도 아닌 현재 대만해협 긴장 수준을 감수하며 중국과 경제 교류를 이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대만 국립정치대 선거연구소가 1994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독립 대 통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과의 빠른 통일을 원하는 국민은 2003년 이후 1%대에 머물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국민도 2007년 7.8%를 정점으로 하락해 올 6월 조사에서는 4.5%에 불과했다. 반면 ‘영원히 현 상태 유지를 원한다’는 32.1%로 처음으로 30%를 넘겼다.
대만의 불명확한 처지를 수용하는 국민이 늘면서 기존 총통 선거 주요 쟁점이던 ‘독립 대 통일’이라는 이념 대결 구도는 힘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만 유권자의 정체성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국립정치대 선거연구소의 정체성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1992년 25.5%에서 지난해 2.5%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대만인 정체성만 지녔다고 답한 국민은 같은 기간 17.6%에서 63.3%로 4배 가까이로 늘었다.
유권자 여론 변화에 국민당도 그동안 지지하던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를 거부한다고 2020년 밝혔다. 중국 정부가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한 이후 홍콩과 마카오에 적용한 일국양제가 사실상 허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대만에서 반중(反中) 여론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일국양제 방식 통일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것이다.
이 같은 여론 변화를 반영하듯 세 총통 후보의 주요 대외 관계 현안에 대한 입장차는 크지 않다. 세 후보 모두 국방력 강화에 동의하고 중국군의 대만해협 훈련에 반대하며 일국양제에 반대한다. 허우 후보도 “대만 독립과 일국양제, 둘 다 반대한다”고 밝혔다. 대미 관계에 대해서도 세 후보 모두 안보 및 경제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세 후보는 1992년 국민당 정부가 중국과 합의한 ‘92공식(共識)’에 대해서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92공식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되 대만(중화민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중 어느 쪽이 중국을 대표하는지는 각자 편의대로 해석하기로 한 합의다.
라이 후보는 차이 총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부하고 있다. 반면 허우 후보는 “대만 헌법에 부합하는 92공식은 수용한다”고 말했다. 커 후보는 “내용이 표현보다 중요하다. 명사에 집착할 필요 없다”며 중국과의 소통 의지를 강조했다.
미 싱크탱크 CNA는 “이번 대만 선거는 정치권 의제가 정체성과 양안 관계를 둘러싼 이분법적 분열에서 경제, 사회 같은 국내 이슈로 옮겨 가는 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 “中, 물리적 압박 대신 경제적 유인책”
중국은 경제 분야 ‘당근과 채찍’을 잇달아 구사하며 국민당 우호 여론 조성과 반(反)민진당 정서를 부추기는 전략으로 총통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달 중국은 대만과 마주한 푸젠(福建)성에 ‘양안 융합발전 시범구’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시범구에서는 대만 신분증만으로 사회보장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주택 구입도 장려해 사실상 푸젠과 대만을 같은 생활권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올 8월에는 검역 과정에서 유해 생물이 검출됐다며 대만산 망고 수입 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민진당 지지 기반인 대만 남부 농업지대를 겨냥한 조치로 풀이된다. 권위주의 정권이 막대한 재정 동원 등으로 압박해 해외 여론을 조작하는 ‘샤프 파워(sharp power)’ 전략으로 분석된다.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2019년 홍콩 시위 이후 반중 정서가 퍼지며 차이잉원 총통이 재선에 성공한 전례가 있다”며 “중국은 이번에는 군사 압박 강화 같은 물리적 영향력 대신 샤프 파워를 구사해 대만인을 유인하는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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